제목 | ■ 나자렛 그 고향 사람들마저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마태 13,54-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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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8-01 | 조회수4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나자렛 그 고향 사람들마저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마태 13,54-58)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저 이는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는가? 저이는 그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니냐?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지! 또 그의 누이들도 다 지금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도대체 저 이는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작은 시골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면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자긍심을 갖는다. 그가 고향을 방문하면 모두 모여 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서는 못마땅하게 여김을 받는다. 예수님의 기적의 힘에 대해 다들 궁금해 한다. 사람들은 그분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그 권위를 의심으로 가득차서 결코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끝내 예수님을 배척한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유독 ‘고향의 친족’에게는 반대를 받는 신세이다. 그렇다. 그들은 겉모습에 매달려 예수님의 본모습을 정녕 보지 못하기에 불신한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속속들이 그 본질을 못 본다. 편견은 그만큼 무섭다. 그러기에 숱한 시행착오다. 예수님의 고향 분들 역시 편견을 지녔다. 그래서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기 그지없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나가자. 이제 그 시선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우리에게로 한번 돌려 보자.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골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교묘한 생각과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를 이끌지 못하게 혼돈의 모습으로 만들기도 한다. 복음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함으로써 예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또 은근히 복음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그 기쁨은 예수님 뜻에 따른 삶에서의 기쁨이지만,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 흐름의 가치관에 따른 천상이 안기는 안락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더군다나 성경을 안다는 이들이 오히려 말씀에 대한 더 강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저곳서 간혹 듣곤 한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양상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들 또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가끔은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게다. 주님께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에게 찾아드는 유혹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이란다. 그분을 섬기는 이는 그분 영광만을 드러내야지, 자기에게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되니까. 사실 예수님의 삶의 터전인 나자렛 고향 사람들도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하였다. 기껏해야 목수 일을 해야 할 그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단지 한쪽만을 생각하고 그곳만을 편견으로 바라보았기에. 영적인 이들도 때로는 이처럼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들기도 한단다. 이따금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기에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만 여기고 만다. 우리도 이웃이 잘되는 것에 기뻐하는지, 아니면 시기하는 마음을 지니는지 성찰해 보자. 주님은 지금도 들릴락 말락 시도 때도 없이 온종일 우리를 부르시며 당신 말씀을 건네신다. 은총은 영적으로 있을 때에 더욱 강해진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만 할게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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