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 1 - 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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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8-02 | 조회수6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14,1) 요즘 상당히 많은 사람이 결정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중하게 심사숙고하고, 시간을 갖고 고심하다 보면 더 좋은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과거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면 오히려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는 표현처럼 자신의 선택-결정-실행의 결과로 빚은 실패와 상처받은 경험이 다른 선택을 앞두고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헤로데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그 여자,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14, 4)하고 말하는 충고가 부담스럽고 거북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보호해 주고자 했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그 점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6,19-20) 그런데 생일을 맞아 손님들 앞에서 조카이자 의붓딸 살로메의 뇌쇄적인 춤을 보고 난 뒤, 격앙된 헤로데는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습니다.”(14,7) 술기운에 객기를 부리고 허세를 부린 꼴이지요. 그는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요구하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붓딸 살로메의 요구에는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요한에 대한 깊은 앙심과 복수심의 표출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 여인, 헤로디아의 앙심이 그런 부당하고 황당한 요구를 자기 딸을 통해 헤로데에게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의붓딸의 요구를 듣는 순간 헤로데는 괴롭고 황당했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14,9) 자신이 이미 한 약속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초대받은 손님들 역시 살로메가 지나치게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었겠지만, 헤로데는 왕인 자신의 체신과 체면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헤로데는 하느님의 시선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했고, 하느님의 인정보다 스스로가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는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찮은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끝내 요한의 목을 살로메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헤로디아가 아무리 앙심에 따른 몰상식한 요구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결정한 헤로데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잘못된 맹세와 결정으로 허망하게 개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난 뒤 헤로데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잘못된 결정을 한 일로 후회하고 두려움을 갖고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보고를 받고 예수님을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14,2참조) 의붓딸에게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과 체면 차림을 위해 거룩한 요한의 목을 베게 한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던 후회스런 사건을 회상하면서 두려움과 불안한 날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가 불행한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근저에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술기운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내뱉는 헛된 맹세 때문입니다. 불행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아니 되고, 취중이나 감정에 휩싸여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앙심에서든 위신이나 체면에서든 자신의 그릇된 선택과 결정은 단지 자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5,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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