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선물인생, 인생휴가, 인생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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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03 | 조회수7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歸家 여정”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천상병 시인하면 생각나는 시가 귀천일 것입니다. 오늘 묵상과 더불어 떠오른 시, 귀천의 마지막 연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소풍을 휴가로 바꿔 읽어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휴가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과연 인생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때, 이 세상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이들 몇이나 될런지요. 영성체송 시편이 고맙게고 아름다운 인생휴가 비법을 알려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바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휴가를 접은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오고 가는 수도형제들의 휴가 모습을 보면 참 금방입니다. 길게 생각됐던 휴가지만 귀원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수도원, 주님의 집에 돌아옵니다. 꼭 우리가 세상에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 휴가가 끝나면 주님의 집에 돌아오듯 인생휴가 끝나는 죽음의 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해야 할 것이나 그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 잠시 인생휴가 중인데 새삼 무슨 휴가?’ 저에게는 실감나는 말마디입니다. 사실 인생휴가중이란 생각을 갖고 하루하루 절실하게 살려 애씁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서서히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날짜도 얼마 안 남았다는 자각으로 살아갑니다.
인생휴가중 잠시 나그네로 머물뿐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은 천상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래서 인생휴가중에 있는 삶의 여정을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의 귀가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휴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참 늘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의 자각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느냐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환상이나 거품이 빠진 본질적 깊이의 선물 인생을 살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인생휴가 멋지게 끝내고 귀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저만 챙기다가 하루하루 생각없이 되는대로 낭비하며 고생하며 허무하게 살다가 귀가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죽음의 귀가날짜에 후회없이 떠나는 자, 몇이나 될런지요? 시편 90편이 다음 대목의 고백과 기도가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믿는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간절한 고백과 기도의 시편입니다. 이 시편 서두 첫절은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입니다. 주 하느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본향의 안식처요, 선물인생을 살아가는 인생휴가중의 지상에서의 삶이 참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가 인간의 숙명입니다.
하느님 주신 선물인생, 파견인생에 반드시 주어지는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입니다. 과연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요 인생사명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루하루 인생과제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밀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써야 하는 강론이나 일기이듯 인생과제도 그러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살았던, 참으로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다했던 분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고유의 인생과제가, 인생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비로소 목숨을 걸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이, 성인이,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분들에게 절대 가치는 생명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느님이였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류의 빛같은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순교자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캄캄한 암흑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악의 무리들 가운데 찬연히 빛을 발하는 세례자 요한 순교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패배인 듯 하지만 그를 잇는 예수님이요, 또 그 뒤를 잇는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에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헤로데의 모습에서 악의 정체가, 허약함이 폭로됩니다. 요한의 순교후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알리니 예수님 또한 분명히 자신의 죽음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에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용기백배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더욱 남은 인생과제, 인생사명을, 하늘 나라 복음 선포라는 인생사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예언자와 대칭을 이루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존재가 진리와 정의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죄많은 백성들에게 용감히 회개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의로운 이들이 있어 존속하는 세상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이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육성을 듣는 듯 당당합니다. 이를 두둔하여 호의적으로 반응한 ‘대신들과 온백성’이 예레미야에 대해 적대적인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압도함으로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길은 정해지면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귀가의 여정길을 바꿀수 없지만 걸음은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인생휴가중 우리 각자의 인생과제를 잘 깨달아 하루하루 잘 실천하며 자발적 기쁨으로 선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ㄱ)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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