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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8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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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04 조회수68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8주일 나해] 요한 6,24-35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초자연적이거나 신기한 현상,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더 크고 놀라운 현상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그저 우연히, 혹은 운이 좋아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 중에 목적이나 의미 없이 그냥 행해지는 것은 없지요. 우리를 당신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또한 그런 경험들은 ‘일상’처럼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평생 단 한 번 마주할까 말까하는 그 특별한 체험이 주는 감동과 기쁨을 마음 깊이 담고, 거기 스며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되새기며, 그렇게 크고 단단해진 믿음으로 하루 하루 하느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삶이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고양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신비체험이나 기적만을 쫓는다면, 사이비나 사기꾼들의 꾐에 빠져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눈에 보이는 기적을 쫓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이라는 표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 ‘신기한 현상’만을 마음에 담고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그분을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듭니다. 그런 잘못된 지향을 아신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 떠나시자, 그들은 수 십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샅샅이 뒤지며 그분을 찾아내지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더 맛있는 것을 더 배불리 먹기를 원합니다. 더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더’를 채운다고해서 그만큼 행복해지는게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더 채우는 만큼 행복의 기준이 더 높아지기에, 아무리 전전긍긍하며 애를 써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참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에 안주하지 말라고, 채우면 채울수록 자신을 더 큰 결핍에 빠뜨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빵을 먹으려면 일을 하여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뭔가 대가를 치러야 즉 ‘그분의 일’을 해드려야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이라는 표현에서 ‘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르가’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각자의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해드려야만 그 대가로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저’ 베푸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양식들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시켜 내 몸과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양식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시는 그분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음식은 그것을 ‘자린고비’처럼 그저 쳐다보기만 해서는 ‘그림의 떡’이 될 뿐입니다. 그것을 입에 넣고 꼭꼭 잘 씹어 삼켜야만 내 몸 안에서 소화되어 양분이 되지요.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그저 귀로 듣기만 해서는 손 안의 모래처럼 다 빠져나가고 말지요. 그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삶 속에서 철저히 실천해야만 내 마음 안에서 싹이 트고 자라 내 영혼을 살찌우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양식’과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특별한 음식인 ‘만나’를 떠올립니다. 자기 조상들이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도 중간에 굶어죽지 않고 약속된 땅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내려주셨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보살피시고 지켜주심을 드러내는 ‘표징’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방점’을 잘못 찍었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기억하다보니, 그런 자기 조상들이 특히 모세가 특별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참된 빵을 ‘내려주셨다’는 점을 강조하여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날 필요한 만큼만 모아들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랐을 것입니다. 광야라는 척박한 땅에서도 자기들에게 양식을 주시어 살리시는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며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에 눈이 멀어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아두었다가 구더기가 끓을 일도,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참된 양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고마는 슬픈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참된 믿음은 누가 더해주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의지와 결단을 통해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표징은 누가 보여주는게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며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찾음으로써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심을, 그런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구원의 표징’,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됩니다. 굳이 먼데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내 안에 모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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