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십자가 지는 삶에 평화의 기쁨이 / 연중 제18주간 금요일(마태 16,2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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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8-08 | 조회수6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십자가 지는 삶에 평화의 기쁨이 / 연중 제18주간 금요일(마태 16,24-28)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캄캄한 하늘을 보자. 밤이 없이 어떻게 아침이 올 수 있겠는가? 죽음 없는 부활이 어디?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는 우리 믿음도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가능하다. 삶 안에서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그 순간에, 기꺼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은총과 용기를 주시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하자. 이렇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면 목숨을 얻는단다. 당연히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나. 그분은 ‘온 세상을 얻고도 죽은 목숨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며 희망의 말씀까지 분명하고도 엄히 해 주셨다. “과연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의 행실대로 갚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이들 가운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이가 더러 있다.” 사실 하느님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희생마저 그저 감당해야만 할 우리이다. 이것이 자신이 져야만 하는 그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누구이실까? 시몬 베드로는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무심중 고백했다. 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라며, 영과의 그 부활을 수차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나.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하시고자 손수 십자가 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시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게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지를 깊게 따져봐야만 할게다.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다른 이에게 베풀고 이웃 앞세우고는 목숨마저 버리라셨다. 그러시면서 온 세상을 얻어도 제 목숨마저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예 ‘자신을 버리라.’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그분을 막상 따르기로 다짐한 우리지만, 어쩜 살다보니까 손해가 너무 막심해 보인단다. 여하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면서 당신 자신도 송두리째 비우셨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바로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이는, ‘그날이 오면’ 당신 부활에 참여할 것이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은 표징과 기적뿐만 보이신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 엄청난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하신 그분께서는 당신의 그 십자가를 직접 보여주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에 일치하는 십자가 지짐을 알리셨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그 결과 그들은 늘 우리 마음에 계신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에. 반면 이 세상에서의 생명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은 유지했지만, 우리에게서는 죽은 이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우리 각자의 몫일게다. 우리가 고난과 가시밭길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택한다면, 내면에는 평화의 기쁨이 가득 차리라. 그리고 그 삶의 참 가치를 깨닫게 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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