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을 것이다.” (18,15)
모든 개별 인간, 물론 인간들로 구성된 정당, 교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실패도 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하고 잘못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잘못을 지적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길 마련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 3월부터 1979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추악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시민 약 3만 명이 쿠데타 세력에게 목숨을 잃거나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주교 80여 명이 모여, ‘침묵으로 상황을 주시한다’라는 결정으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잘못된 결정과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 9월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도하에 군사정권 시절 교회 인사들의 죄를 고백하는 문헌 「내 죄」를 발표했으며, 그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유와 인권을 해친 사람들에게 너무나 너그러웠습니다. (중략) 책임 있는 사람들(=주교단)의 침묵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정치적 충돌, 자유의 말살, 고문과 감시, 정치적 박해와 사상적 강요에 참여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 시사 IN 361호에서 퍼옴) 결국 과거사에 대한 교회의 반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과오는 바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결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침묵입니다. 군사 정권하에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침묵은 결국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기에 반성한 것입니다.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으신 교황님께서 자신이 말해야 할 때 강론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신 것이라 저는 느낍니다.
더욱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파수꾼으로 내세워진 참된 예언자의 소명이란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악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만일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발생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예언자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 및 부패를 보고도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몫이 바로 예언자적인 소명으로 불린 우리 그리스도인이며 그중에서도 책임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에겐 더욱더 큰 책임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타인의 잘못을 보고 침묵하기보다는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만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라는 격언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작은 실수는 그 사람 스스로 알고 느끼도록 조금은 미루어 두는,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함께 살아가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주고 감싸주고 있다고 느낄 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신뢰와 서로를 향한 배려가 생겨나서 공동체 내에 활력이 넘치리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가 잘못했음에도 스스로 깨닫지 않을 경우, 더욱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접근하고 처신해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형제적 충고를 해야 할 경우, 먼저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둘이 만나서 타일러 주라는 의도는 결국 형제적 충고의 목적이 바로 그 형제의 죄와 잘못의 지적이나 추궁에 있지 않고 그 형제 자체 곧 그 형제에 대한 사랑 어린 관심과 배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잖아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둘째로 개인적인 따뜻한 형제적 충고를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 형제를 충고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표현의 바탕은 바로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18,16)라는 형제적 권고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견해가 아닌, 보다 더 확고하고 객관적인 증거나 사실을 바탕으로 형제적 권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책임자로 있을 때 저는 이 방법을 즐겨 사용했는데,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군요. 세 번째 권고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8,17)라는 권고입니다. 이상한 일은 공동체는 잘못한 그 사람보다 때론 오히려 그 잘못을 해결하려고 하는 책임자를 더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당신은 힘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이랍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 17) 이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네 삶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을 백안시하고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사람들과는 절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쫓으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용서와 사랑에 반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절교나 파문이 아니라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는 잘못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인가 아닌가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덕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향한 형제들의 형제적 권고를 기꺼이 듣고 자발적으로 자기 잘못과 죄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잘못을 기꺼이 충고할 수 있는 성숙하고 따뜻한 사람과 그런 지적에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 사랑의 관계와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함께 더불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질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사랑 어린 충고를 하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합시다. 혼자 하느님께 나아가려 하지 말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형제에게 대한 사랑에서 기꺼이 충고하는 것을 게으르지 않도록 합시다. 이런 점에서 서로에게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데 서로 주춤거리지 말고 사랑의 빚을 지우도록 합시다.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사랑 어린 말 한마디가 형제가 잘못 했을 때 일어설 수 있는 큰 지팡이 노릇이 될 것입니다. 형제 하나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형제 하나를 잃는 일도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 충고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의 의무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약한 본성에서 저지른 잘못과 실수를 볼 때마다 때론 기다려주는 의미에서 침묵해야 하지만 형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할 때 기꺼이 사랑으로 충고하게 하여 주시고, 나 또한 누군가가 저에게 사랑 어린 충고를 해 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그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과 형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주시고 저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축일을 기억하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순교 사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시고 타인(=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름 없는 사람, 곧 숫자로만 기억되어질 사형수)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증거하신 분이 바로 콜베 신부님이십니다. 폴랜드의 아우슈비치를 방문했을 때. 저는 그분이 마지막 삶을 사셨던 방에 잠시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점은 콜베 신부의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셨던 말마디가 제 가슴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