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9,14)
어른은 예전에 모두 다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어린이다움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어린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다움을 정의하지만, 어린이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는데도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다움을 찾으려 합니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으며,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린이를 잘 모르고, 어린이다움이 무언지 잘 모르지만, 다만 어른이 되면서 어른들을 볼 때, 어른을 두고 어른다움으로 묶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어른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이는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여전히 어른이 기준이어서 어린이다움으로 묶으려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어린이다움이라는 동일하고 고정 불변한 속성으로 어린이를 묶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다움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 어린이의 존재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빌어주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모든 본당에서 영성체 시간이 되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어른 예비 신자들과 어린이들이 축복받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려주고 축복받고자 하는 마음 밑바닥에는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다, 고 하는 믿음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9,14)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린이들이 지닌 그 무엇이 하늘나라에 가장 최적화된 영성적인 면일까를 궁리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이현주 목사의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책에 보면, 오늘 복음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해설하는 부분인데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 (...)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에게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프랑스의 종교 학자인 르낭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요소는 첫째로 어린아이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즉 소외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시대 가장 작은 자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호의가 넘치셨기에 늘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언제라도 어린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축복하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19,15)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축복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