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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0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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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18 조회수74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20주일 나해] 요한 6,51-58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몇 번의 엠티와 두 번의 캠프를 다녀오고나서 느낀 것인데 우리 청년들 술을 정말 좋아들하고 잘 마시는 것 같습니다. 기운 없이 축 쳐져있다가도 술 한잔 들어가면 저렇게 기쁜 표정이 나오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세상살이가 오죽 힘들고 괴로우면 그럴까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제로서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다른 청년들처럼 술과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있느라, 정작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하느님 말씀이나 기도 같은 것들이 주는 영적 즐거움에는 소홀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지요.

 

그런데 그런 걱정은 옛날 초기 교회 때부터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집중하고 전념해야 할 ‘참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당장 눈에 자주 띄고 접하기 쉬운 세상 것들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술, 게임, 도박, 마약, 성적인 쾌락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것들이 쉽고 편하고 빠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기에 당장은 만족스러울지도 모르나, 그런 것들에 취하기 시작하면 금새 ‘중독’에 빠지고 영혼과 정신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그것들이 주는 즐거움은 굉장히 자극적이만 오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쉽게 내성이 생겨 점점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 것들 말고 주님 말씀에, 그분 사랑에, 참된 희망에 취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먹고 마시며 맛들여야 할 게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추구하고 먹어야 할 참된 빵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 이야기의 종합편이자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생명의 빵’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밝히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여기서 ‘살’로 번역된 그리스어 ‘사륵스’는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의 ‘육신’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맺는 ‘인간 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형제를 ‘내 살’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가까운 가족을 ‘살붙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는 것은 그분과 우리가 혈연으로 묶인 한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레위기 17, 11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당신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즉 당신 전부를 내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단지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과 깊은 사랑이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의무가 주어집니다. 바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면 예수님은 내 몸 안에, 마음 안에, 영혼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내 안에 머무르신다고 해서 갑자기 내 행동거지가 달라지거나 삶이 180도 변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고 계심을 믿고 떠올리며 도움을 청하면, 그분께서 언제나 든든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나와 함께 해주시며 힘을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추구하시는 ‘머무름’입니다. 나를 당신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시는, 내 안에서 일일히 간섭하고 혼내며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깨우쳐 주시고 도와주시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도움과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주님께 받은 사랑에 맞갖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체성사의 신비를 삶 속에서 충실히 드러내고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를 내 안에 모시고 세상에 파견되고서도 주님과 관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주님을 모르는 이들보다 더 심한 거짓과 위선, 게으름과 나태함, 탐욕과 이기심 등의 죄를 지어 내 안에 머무르시는 예수님을 속상하게 만든다면, 절대 ‘주님 안에 머무른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참된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단지 입 안에만 모실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 깊숙이 받아 모셔야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해야만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무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표현하시지요. ‘딸 바보’인 아빠는 사랑하는 딸에게, 아들이 자기 삶의 전부인 엄마는 소중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아빠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신을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직장에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것은 ‘아빠,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힘을 주는 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해도해도 끝이 없는 힘겨운 집안 일을 오늘도 묵묵히 해낼 수 있는 것은 슬며시 뒤로 다가가 뭉친 어깨를 주물러주는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살아갈 힘이자 이유가 되어주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사랑의 힘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사는 이유이자 삶의 의미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라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느라 힘들고 괴로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이었기에, 당신의 순명과 희생이 아버지께 큰 기쁨과 영광을 드릴 수 있음에 행복해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이 지닌 힘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된 기쁨과 보람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도 예수님 때문에 살기를, 그분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부터 살아갈 이유를 찾고 힘을 얻으며 용기를 내기를 바라십니다. 그 용기와 힘을 바탕으로 당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과정에서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찾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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