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쓴맛의 단맛을 본다.
지지난 주일부터 계속되는 영원히 살게 하고,
살아 있는 빵이신 주님의 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화답송도 지난주와 같은 화답송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이 시편과 함께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쓴맛의 단맛을 보게 된다!!!
시편의 이 구절이 제게는 가장 사랑하는 시편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맛보고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것으로 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미국을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제가 국수주의적이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거부감이 컸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영화도 보지 않았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미국 음식은 다 Junk Food(정크 후드) 곧 쓰레기 음식이라고 여겨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햄버거는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시시 성지순례를 했고,
그때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저의 형제들이 제 입맛에 맞을 거라면서
올리브를 한번 먹으라고 권하였는데 먹어보니 과연 제 입맛에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미국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먹었어도 미국 사는 동안 음식으로 덜 고생했을 것이고,
한 번 맛이라도 봤으면 맛 들이게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머리를 한 대 맞듯 큰 깨달음이 왔고
그때부터 앞서 얘기한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얼마나 좋으신지 한 번이라도 맛을 보면 진짜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한 번 맛을 보지 않습니까?
그 한 번을 맛보지 않는 이유가 올리브를 안 먹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들은 입맛, 맛 들인 입맛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길들고 맛 들인 입맛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먹던 것만 좋다고 하고 먹던 것만 고집하기에
새로운 것은 맛없다고 하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맛의 전환 곧 새로운 맛 들임은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단맛의 쓴맛을 보는 것,
단맛이 쓴맛으로 바뀌는 체험은 내가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체험은
주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좋아하고 원하던 것을 주님이 좌절케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지고, 병에 걸리고, 원하던 기사가 되지 못하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데
우리가 설상가상이요 엎친 데 덮쳤다고 하는 이런 일들은 프란치스코의 경우처럼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즉시 알아채야 하지요.
그런데 보통은 뒤늦게야 그것이 하느님의 개입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단맛의 쓴맛을 봤다고 맛의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기까지 해야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쓴맛이 저절로 단맛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이것도 은총에 의해서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은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자기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다고 그는 회고하며,
나병 환자를 껴안았을 때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고 비로소 세속을 떠났다고 합니다.
세속의 입맛은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포기하게 되고,
천상의 입맛은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것을 우리 스스로 택하지 않기에
주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은총으로 우리 입맛을 바꾸시고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통의 은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