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19,21)
늘 살아오면서 직면하는 의문이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심을 느끼고 살아가는데도, 그리고 수도원에서 늘 주어진 모든 일과표를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데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내적 텅 빔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의 의문,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19,20)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되리라.”(19,21)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점 더 명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6,20~21) 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들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특별 성소에 대한 전형적인 초대로 이해되어왔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의로 이해한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이 내용은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이며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요건입니다.
오늘 복음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9,16)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곧 그의 관심은 존재의 측면보다 활동과 소유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마치 자신의 행위나 소유로 취득하고 획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지극히 교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제쳐두고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9,17)하고 그의 질문에 동일한 눈높이에서 답변하십니다. 답변의 근저에는 선이란 무슨 일이나 활동이 아니고 어떤 분 곧 존재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의 잘못된 관점을 선한 마음에서 수정해 주십니다. 곧 요점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단지 부자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의식 또한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취득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 젊은이가 한 질문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으로 고쳐 답변하신 의도를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리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라, 고 언급하시는데 그 계명이란 모든 사람(=유다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십계명의 일부에다 이웃사랑을 덧붙여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젊은이는 명쾌하게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켜왔노라고 응답하면서 이에 대화를 끝내지 않고, 그럼에도 제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는 곧 그 젊은이의 내면 깊이 내재해 있는 보다 더 초월적인 그 무엇을 향한 갈망에서 기인한 물음이라고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려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완벽하고 완전해지고 싶은 욕심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 젊은이의 열정과 젊음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화의 결과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그 젊은이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 젊은이의 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성서는 슬픈 결말을 보여줍니다.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과하긴 하지만, 그 젊은이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이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진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떠났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가장 장점이며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실 가장 큰 장애물이자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싶네요. 그토록 추구하던 것을 목전에 두고서 돌아서야 하는 그 처지라니.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선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기에 그에게 다소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제안을 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그 젊은이가 보다 완전한 존재를 꿈꾸고 있다고 보았기에 지금껏 몸에 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행동양식을 보여 달라고 초대했지만, 그는 결국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갈망하던 완전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까닭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어쩜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 존재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진실은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애착 곧 나와 나의 소유물 그리고 나의 꿈과 이상, 내가 살아온 세상과 관계에 억눌리고, 묶이고, 사로잡혀서 그런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삶이라, 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지 그 젊은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겪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이며 상태입니다. 신앙생활 혹 제자의 삶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상상이 아닌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교황님께서 수도자들과 만남에서 강조하신 면도 가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아 그 부자인 젊은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궁금하네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