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
여러분 혹시 우리나라 헌법은 몇 장 몇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처음 알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제10장 130 조문과 부칙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유대교의 율법은 무려 613가지나 되는데, 그 가운데 248가지는 ‘~해야 한다.’는 명령이고, 나머지 365가지는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금령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은 이렇게 많은 계명을 어찌 다 지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하고 물었듯이, 그들 전통에 의하면 탁월한 율법 교사들은 이토록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논하곤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기회를 맞아 예수님 또한 당대 경건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생활화된 신앙고백문의 첫 부분인 신명 6,5절을 인용해서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이웃 사랑’으로 응답하시면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40)라고 답변하십니다. 결국 어느 분의 표현처럼 구약과 신약이라는 약(?)을 약탕기 잘 달여 꽉 짜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의 첫돌 판에 새겨졌던 전반부의 네 계명은 순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둘째 돌 판에 새겨진 여섯 계명은 순전히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두 돌 판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자연히 이웃과의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마련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도 동일한 음조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4,20)
제가 알았던 한 분은 늘 언제나 제게 동일한 질문을 몇 년 동안 계속 물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제게 주님을 믿습니까?, 도 아니고 늘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으셨는데 이제야 그분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원 신부님이 방문객에게 묻기를, 혹시 이 세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고 하자, 그 방문객이 되묻기를 수도자들도 어기는 법인가요?,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이 대답하시기를 수도자들도 어기지요. 특히 수도자들이 더 많이 어긴답니다, 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치 제게 한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제가 자주 많이 어기는 법, 그것은 알면서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고 말한 만큼 실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나 모택동처럼 온 인류를 변화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동은 결국 사랑의 운동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그가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딱 하나면 됩니다. 오늘 나는 사랑하며 살았나! 성 아오스딩은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 심판을 바탕으로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25,31~46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매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결국 내가 엄청나게 큰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곧 선행을 베풀고,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13,3) 다시금 오늘 하루도 사랑하면 살았나?,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족하리라, 믿습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멘.”(화답송 후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