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오로지 사랑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마태 22,34-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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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8-22 | 조회수5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오로지 사랑 / 연중 제20주간 금요일(마태 22,34-40) ‘한 바리사이인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첫째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 속을 떠보려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묻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 사랑뿐이란다.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생각했을 게다. 그래서 율법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이들도 쾌나 있었단다. 그런데 그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이민족이 침입해 종교를 훼손하였다. 이에 순수성을 지키려 바리사이가 등장했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려고 애썼다.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경건할 수 없었고 직업에도 충실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을 나타내셨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단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나. 이렇게 너무 율법에만 집착하다 보니 율법 근본인 사랑을 잃어버리곤 했다. 자칫 잘못하여 기계적인 신앙생활에 빠져 큰일 나는 줄 여겼다. 그러나 큰 틀에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전례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자칫 글자 그대로 그 사랑에만 집착한다면, 그만 본래의 순수성을 놓치기 일쑤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께서 이르신 그 사랑 정신을 스스로 자문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으면 한다. 오늘 나의 이 선택들이 당장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연할지라도 다시금 숙고를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게다. 어쩜 마음은 모든 걸 담는 그릇이라나. 마음은 늘 비워 두는 게 아닌 줄곧 사랑을 채우는 곳이란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 금방 다른 게 채워질 게다. 시도 때도 없이 온갖 게 다 담기리라.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빈 마음 한 구석에 이 사랑을 채우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만나는 이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선물‘하려는 거다. 사랑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사실 세상에는 사랑을 받아야 할 이들이 참 많다. 사랑에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외면당하는 것 같다. ‘도대체 이 많은 이를 어떻게 사랑합니까?’라고 질문에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대답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이를 결코 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 앞에 있는 오직 그 이만을 죽도록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이기에, 당장은 내 앞의 그것만 사랑하면 될 게다. 그이에게만 주어도, 그게 또 다른 선물로 될 터이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사랑이신 그분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오직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사랑이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 받아서 그분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바로 이 사랑이다. 이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사랑이신 그분만이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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