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친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 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덕들은 그저 귀부인이라고 하고,
지혜를 덕들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잖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저의 가난 역시에서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만 해도
가난을 제일 중요시하는 우를 범했고
가난하지 않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미워함으로써 가난 때문에
더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놓치는 큰 잘못을 범했었지요.
그리고 실로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싸웁니다.
시비(是非)를 많이 가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비의 시(是) 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옳다. 바르다’라는 뜻이 기본이지만
‘옳다고 하다’라는 뜻과
‘바르다고 인정하다’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옳다고 인정해주면 싸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가 옳다고 하기에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의(義) 또는 정의(正義)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옳기 위해서는 남이 한 것은 그른 것이 되어야 하고,
나의 주장이 옳기 위해서는 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분쟁적인 공동체에는
같이 옳은 것을 찾아가는 사랑의 정의는 없고,
서로 자기가 옳다는 독선적 주장만 있으며,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긍정은 없고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이 ‘자기(自己)’는 없고,
사랑을 사랑하는 참 ‘자아(自我)’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이기에 하느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라는 뜻도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란 나와 하느님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합일적이고
공존적인 나 또는 자아이어야 하는데
나만 있고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분열적이고 공멸적인 자기(Ego)이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지도 못하고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아무 사랑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 없이 나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홀로 장군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지요.
훌륭한 병사들 없이 훌륭한 장군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네가 있기에 나도 있고,
너를 긍정하기에 나도 긍정 받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도 사랑 받는 그런 사랑,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를 포함하는 하느님의
모든 조물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