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가려거든 가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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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8-25 | 조회수5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늘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저자는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시편119,103).“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119,105).하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 그분을 알면 더없이 큰 갈증을 느끼게 되거늘 미처 알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알게 되는 것이니 이 시간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끝없는 선택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무엇을 할까? 성당에 갈까? 밭에 일하러 갈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면 차라리 돌아 갈까?’음식은 뭘 먹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때가 되면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정이 행복과 불행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래된 얘기지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하나 잘못 고르면 10년 동안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주님을 택하면 생명이요, 육적인 욕망을 택하면 죽음입니다.
1독서를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도 다짐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두개, 물고기 다섯 마리로 오 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시고 배를 이용해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쫓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하고 속을 콕 찔렀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냉혹하고 잔인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베드로는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가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단은 삶의 매순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확실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 말까?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3,15-16). 그런 의미에서 미사참례에 함께하신 여러분은 하느님을 택하셨으니 복됩니다. 행복하십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어딜 가다니요? 길은 여기 있고 당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소?”길은 이미 있고 그 길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천상,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집이기 때문에 가야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집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굴곡이 있어도 목적지에 닿아있다면 묵묵히 가야합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운 길이라도 목적지에 연결되지 않았다면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하셨지만 많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북해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믿음이 있고 누가 믿음이 없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하셨다면 우리도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떠난다고 나도 떠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친구 따라 강남가지 말며 매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지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알고 나서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지식의 검증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일단 선생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먼저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게 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따름으로써 알게 되었고, 그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능력이 따르고 치유가 따르며 위안도 평화도 기쁨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은총은 이미 주어졌고 역사하고 있으며 앞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지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결단을 내리십시오. 떠나든지, 주님 안에 머물던지….. 가려거든 가시오!
성 안나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눈이 나빠서 고생을 하셨지만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눈이 더 나빠지면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하시며 틈만 나면 성당에 오셔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영적인 눈과 함께 육적인 눈도 밝아졌습니다. 놀라운 역사입니다. 주님 말씀을 갈망한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은 언제나 역사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주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소크라 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수학선생님이 말한다면 ‘네 분수를 알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국어선생님께서 말하면 ‘네 주제를 알라’그리고 지리 선생님은 ‘네 자리를 알라’ 고 하십니다. 미술 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고 했을 것이랍니다.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주님의 사람인가?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입길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주님을 만들지 말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나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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