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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탈렌트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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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31 조회수64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4-30)”

 

 

 

1) ‘탈렌트’를 ‘주님의 것, 주님께서 주신 은총,

 

주님의 선물’이라는 생각만 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탈렌트를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즉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인데,

 

내가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탈렌트를

 

돌려받지 않았고, 종들이 탈렌트로 돈벌이를 해서

 

더 벌어들인 탈렌트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종들은 처음에 받은 탈렌트와 더 벌어들인 탈렌트를 모두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준 것은, 자신이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기 위해서”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21절, 23절).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다면, 그것은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받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비유를 보면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준

 

탈렌트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갑니다(28절).

 

<돌려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주인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종을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씨’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그 씨를 심고 가꾸고 잘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도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2)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에 대해서, 비유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탈렌트의

 

차이는 ‘은총의 양의 차이’도 아니고, ‘능력의 차이’도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그 다양성은 보통 ‘옹기장이와 진흙’으로 설명됩니다.

 

“옹기장이가 제 손에 있는 진흙을 제 마음대로 빚듯,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께서는

 

당신 결정에 따라 인간에게 되갚으신다(집회 33,13).”

 

 

 

3)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한 말,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은다.” 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빼앗아 가기만 한다.” 라는 비난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바치는 것이 많은데도

 

받는 은총이 별로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주인이 세 번째 종을 꾸짖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큰 죄에 속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우리는 최소한 악행을 행하지는

 

않았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이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 큰 죄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또 이웃들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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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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