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2주일 나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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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01 | 조회수9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2주일 나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마르 7,1-8.14-15.21-2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한 아리따운 처녀가 강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전날 많은 비가 내린 탓에 물이 불어서 아녀자 혼자 그 강을 건너다가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고가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대선사 경허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처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혹시 자기를 업고 그 강을 건너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젊은 스님은 정색을 하며 처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불가에서는 여색을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저희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허스님은 선뜻 그녀를 등에 업고 강 건너편에 내려주었고, 계속해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젊은 제자는 불가에서 금지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혹시 '땡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 의구심은 길을 걷는 동안 점점 더 심해졌고, 젊은 제자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서 걷던 스승에게 따졌습니다. “스승님, 수도생활 하시는 분이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젊은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젊은 제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경허스님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그 처자를 한참 전에 강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왜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두 스님 중 불가의 계율을 제대로 지킨 사람은 누구일까요? 외적인 형식에 얽매여 곤경에 처한 중생을 차갑게 외면했던, 그리고는 그런 자기 행동을 기준삼아 남을 비판하고 단죄하느라 정작 자기 마음 속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차게 만들었던 젊은 제자일까요? 아니면 자비와 선, 그리고 중생 구제라는 불가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계율을 적용하는데에 융통성을 발휘했던, 그리하여 마음이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했던 경허선사일까요? 너무다 대조적인 두 스님의 모습을 통해,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떤 방식으로 지키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부를 때마다 언제라도 달려와 우리 곁에 계셔 주고 싶어하시는 사랑과 자비 넘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당신과 우리 사이의 가깝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계명’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주셨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법과 규정들을 충실하게 잘 지킨다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들을 마음껏 누리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된다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의 가까움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그 계명들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율법규정과 관습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켜야 할 규정들이 늘어나면서 그것들 하나 하나를 다 지키기가 너무나 버거워져버렸습니다. 그 규정들이 지키고자 했던 계명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린 채, 각각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데에만 급급해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따지기에 이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물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변질’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느님께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햇습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꾸만 우상숭배에 빠졌던 부정, 하느님께서 세우신 정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의 논리와 타협하려 했던 부정 등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그런 무시무시한 재앙을 겪게 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계명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자기들의 부정함을 씻으면 다시금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고 그분께 사랑받는 거룩한 백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율법을, 특히 정결법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곧 하느님”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율법 규정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의로움을 판단하고 평가했습니다. 나병 같은 중병에 걸린 환자나 하느님과 율법을 모르는 이교도들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더러워진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들과 접촉하면 자신들 역시 부정해진다고 여겨 철저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다 자칫 실수와 잘못으로 부정해지더라도 정결 예식을 통해 외적인 더러움을 씻으면 그런 부정함도 사라진다고 믿었기에 지나칠 정도로 손을 씻고 그릇도 열심히 닦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 뜻에 비추어 자기 내면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깨끗함을 바탕으로 자신이 ‘거룩하다’고 포장하며,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하고 부정한 생각과 욕망들은 꽁꽁 감추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자기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율법을 무기 삼아 다른 이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열중했고, 그러는 사이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입술로만, 외적인 형식으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척’ 할 뿐, 정작 그 마음은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그들의 ‘위선’을 강도 높게 비판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도구로 삼은 정결법이란 것도 계명이라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인간이 만든 전통에 불과할 뿐임을, 그들이 그 전통에 얽매여 외적인 깨끗함에 집착하는 사이, 정작 그 계명이 추구하는 목적인 하느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음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신앙생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섬김의 자세를 표현하는 양식인 ‘경신례’가 참된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이 나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담는 것입니다. 진심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없는 참된 마음’(眞心)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마음을 다함’(盡心)이라는 뜻입니다. 거짓 없이 참된 마음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랑을 통해 깊은 친교를 맺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해서 형식은 소홀히 하고 마음에만 신경쓰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속은 깨끗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깨끗한 척 하는 게 ‘위선’이라면, 나는 속이 깨끗하니까 겉으로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자기 편한대로 하는 건 ‘교만’에 해당합니다. 위선이나 교만이나 둘 다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이지요. 그러니 계명의 형식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을 ‘바리사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핑계 삼아 영적인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진정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계명에 대한 내적인 지향인 마음과 외적인 지향인 실천이 일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일치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코린코 1서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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