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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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9-02 | 조회수6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루카 4,16-30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을 방문하시어 그곳에서 진행되는 유다교 전례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 예식은 보통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지요. 예식이 시작되면 회중이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뒤 율법서를 봉독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신앙 고백인 ‘쉐마 이스라엘!’을 낭송한 뒤 시편과 ‘18조 기도문’을 바칩니다. 이어서 첫번째 독서자가 율법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해 설교한 다음, 두번째 독서자가 예언서를 읽고 그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의 축복문 낭송을 끝으로 전례가 마무리 되지요. 오늘날 가톨릭 미사에서 성찬의 전례만 빠진 형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독서자의 역할을 맡으셔서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셨는데, 그 안에는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임명된 ‘그리스도’의 소명, 즉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지요. 그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는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쉽고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안겨주었던 겁니다.
그러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에 전해지는 강한 울림과 감동을 느끼면서도, 번지르르한 말만 앞세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담겨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가난하고 무식한 목수의 아들에게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왔음을 놀랍게 여길 뿐, 그것을 ‘복음’으로써 즉 자기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기쁜 소식으로써 마음 안에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머리와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게 그런 지혜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 일종의 ‘인지 부조화’가 생겼고, 그것이 그 말씀을 제대로 귀기울여 듣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지요. 사막을 헤매던 것을 오아시스 앞에 데려다주었는데도 물 마시기를 거부하는 고집 센 낙타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니 굳이 힘들게 복음 말씀 같은 걸 찾아서 듣고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자기들을 알아서 구원하실 거라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있던 수많은 과부들을 놔두고 이방인 과부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어 구원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던 유다인 나병환자들을 놔두고 이방인 장수 나아만에게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구원받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분께 선택받았다고 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면 선택된 사람답게 오히려 더 충실한 신앙생활과 계명의 실천으로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어야 했지요. 그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주일미사 참례라는 최소한의 의무만 겨우 지킨다고 해서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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