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에파타’ 뜻에 따라 열리기를 / 연중 제23주일 나해(마르 7,3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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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9-07 | 조회수8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에파타’ 뜻에 따라 열리기를 / 연중 제23주일 나해(마르 7,31-37)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른다는 우리도, 가끔은 “말이 안 나온다. 또는 기가 막힌다.”를 자주 쓴다. 어려움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이 경우다. 내가 겪는 고통을 알아주는 이 없어 가슴이 답답한 때도 더러 있다. 반벙어리가 곧 그러한 이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아픔을 지닌 그의 처지를 헤아리셨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과 관심으로 부르시어 고치셨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을 지나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그분께 데리고 와,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람들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향해 한숨 내쉬시고는,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거기에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외치셨다. 그분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아람어’다. 사람들은 너무 놀랐기에 예수님 말씀을 ‘발음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이사야의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라는 예언에 예수님께서는 “에파타!”하고 이르시면서 실현하신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는 그를 우리라고 어디 생각해 보자. 물론 우리는 들을 귀를 지녔다. 하지만 주님 말씀에 얼마만큼 새겨듣는지를 돌아봐야 하리라. 그분께서는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일상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만을 아는 이는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듣기보다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기도취의 굴레에 빠진 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 주어져 지금까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게 되리라. 아울러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는, 어쩜 놀라운 일 이루게 될 게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며 전하고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 행위는 우리에게 더 넓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귀머거리나 말 못하는 이가 될 게 눈에 보듯 뻔하다. 정전이 되면 답답함을 느끼듯이. 외국에 나가면 말이 안 통해 참 갑갑할 때가 많다. 그 답답함을 지닌 이의 눈과 귀, 입이 열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걸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지금 그분께서 우리에게 “에파타!”라고 명하신다. 당신께서 어둠과 침묵에 갇힌 우리에게 귀와 입이 열려 말벗이 되시고자. 무엇보다도 마음의 귀를 생각하자. 이렇게 하느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있도록 하자. 주님과 이웃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에. 따라서 우리는 그분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고,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라면 주님께 “에파타!”라며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한다. 이처럼 주님 말씀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그분 말씀 귀여겨 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그렇게 하여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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