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6,39)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의 제목입니다. 사라마구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6,39)의 말씀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서문에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주시하라. 만약 당신이 주시할 수 있다면, 관찰하라.” 그러기에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었고,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책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부분을 인용합니다. 『난 우리가 눈이 먼 게 아니라, 이미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눈이 멀었지만, 보고 있는. 볼 수 있는 눈이 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라는 구절을 들어, “인도하는 사람은 눈이 멀어서는 안 되며, 앞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현명하게 이끌기 위해 지혜가 필요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될 위험이 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믿고 따르는 이들, 곧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무지와 편협의 어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자각으로 초대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이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란 소설의 후속 편의 제목을 「눈뜬 자들의 도시」라고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을 다른 시선에서 파악하기 위해,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극배우인 마르틴 발트샤이트(Martin Baltscheit)가 발표한 「다섯 명의 과학자와 코끼리」라는 어린이 창작동화를 소개합니다. 이 동화책은 진실 앞에서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집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볕 좋은 날, 눈먼 다섯 명의 과학자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코끼리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생겨 당황한 과학자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먼저 코끼리 코를 만진 한 과학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것은 소방차 호스”라고 말했습니다. 발을 만진 과학자는 “떡갈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꼬리를 만진 과학자는 “화장실 솔”이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과학자들도 각각 코끼리의 등과 귀를 만지더니 “산 같다”, “양탄자 같다”하며 서로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코끼리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때 서커스 단장이 숨을 헐떡이며 과학자들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혹시 덩치는 산만하고 귀는 양탄자 같고, 다리는 나무줄기 같고, 꼬리는 화장실 솔 같고, 코는 소방차 호스같이 생긴, 코끼리가 지나갔나요?” 과학자들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코끼리는 이리로 지나가지 않았소.”』
그들은 모두 여전히,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섯 명의 눈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무엇이냐, 는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판단했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서커스 단장이 자신들이 찾고 있던 진실 즉 코끼리라는 정답을 알려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바를 제대로 알아들으셨는지요. 이 두 말씀에서 눈먼 이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부저소정저釜底笑鼎底 가마솥이 노구솥을 보고 검다고 비웃는다.’는 속담처럼, 자신의 허물이 큰 것은 모르고 남의 작은 결점을 들춰내어 비웃는 사람이 널렸습니다. 눈먼 이는 단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종교인 중에도, 정치인 중에도 많고 많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허물이나 무지의 어둠, 눈멂을 아는 게 깨달음의 시작이며 진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지 말고 “주님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시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6,40)라고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