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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승국 신부님_부단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과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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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6-18 조회수118 추천수3 반대(0) 신고

 

 
 
유다 사회 안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들로 손꼽히는 부류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배운 사람들, 고위층 인사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제들! 
 
같은 사제로서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사제들의 삶이란 것, 쉽게 위선자로, 이중 인격자로 전락하기 쉬운 삶인 듯합니다.
항상 강론대에 서야 하고, 뭔가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구체적인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도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의 성실한 전달자들이었으며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성전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지식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가장 가까이 살았던 그들이 점점 하느님과 가장 멀어진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점점 타성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핵심은 외면한 채,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정신이나 신앙의 성장, 쇄신 작업은 뒤로 한 채,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었기에,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다의 한 랍비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선적인 것 중의 십 분의 구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강한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한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었어야 할 제관들과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나 자선, 기도, 금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에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한 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꿰뚫고 있으면서 영적인 삶과 세상에로의 투신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형식주의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선의 극복, 그것은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위선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본래의 나약함과 한계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시금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치명적인 결함인 위선과 이중성, 언행의 불일치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터넷에 잘못된 정보나 의도적인 거짓말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많은 부분에서 잘못된 정보나 거짓말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특히 건강이나 정치에 관한 부분은 다른 내용에 비해 거짓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미국 텍사스 대학에서 연구한 내용에 의하면, 유튜브에서만 평균 20~30%의 잘못된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보고 있는 정보를 무조건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어느 분이 제게 신비스러운 임사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고 인터넷에 그런 영상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내용만 보셔서 알고리즘이 작동해서 그런 영상만 보여주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영상 내용을 가지고 무조건 따라야 할 교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많은 이가 거짓된 삶을 삽니다. 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삶을 살면서, 옳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하지요. 오래 굴릴수록 더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인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사랑만이 거짓에 물들지 않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에 관해 말씀해 주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또 기도할 때는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식도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을 숨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보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은 위선자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짓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갚아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삶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삶 중에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삶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을 탓하는 사람은 아직 갈 길이 멀었고 자신을 탓하는 사람은 절반쯤 온 것이며 아무도 탓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도착한 것이다(중국 속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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