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아플 때 아프다고, 슬플 때 슬프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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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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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9 | 조회수172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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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믿으니까 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하지도 않겠지만, 하더라도 ‘빈말’입니다.
2)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께 도와달라고(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해야 할 일이고, 신앙인이니까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상황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아플 때 아프다고, 슬플 때 슬프다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소연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간절하게 기도하다 보면, 아직 기도가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기도를 통해서 평화와 힘을 얻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평화와 힘’이 아버지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그대로 주실지, 더 좋은 것을 주실지, 아니면 거절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주시더라도 언제 주실지, 그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르니까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고 믿어도, 우리는 자신의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한 소원이 없다면, 감사와 찬미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사실 감사기도와 찬미기도는 평소에도 늘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3) ‘주님의 기도’는 기도문의 견본이고, 모범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하시는 당부 말씀이기도 하고,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청원기도 형식의 찬미기도입니다. 후반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청원기도이고, 동시에 신앙생활 지침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글자 그대로 ‘일용할 양식’, 즉 ‘오늘 먹을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뒤의 24절에 나오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에 연결됩니다.
4) 구약성경 ‘잠언’ 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너무 가난해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너무 부유해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가난함이든지 부유함이든지 간에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용서’는 화해와 일치를 위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사람들과도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노력에서 ‘용서’는 필수 조건입니다. 만일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안 하고 있다면, 그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거짓 기도’이고 ‘빈말’입니다. <미사 때에, 영성체를 하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하고, 또 ‘평화의 인사’를 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형제들과 용서와 화해와 일치를 이룬 다음에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용서하기를 거부하면서 영성체를 한다면, 그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2025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_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한 후회로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앞이 막막한 상황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냥 포기하라고 하실까요? “왜 사니?”라면서 우리를 혼내실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아마 이렇게 위로해 주실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배워가는 중이다.”
이 위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막막함, 죄책감, 후회를 벗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 드리고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형편없는 성적이어서 걱정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 성적표를 보여 드렸을 때,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도장을 찍어 주시면서, “다음에는 잘할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제게 배워가는 중임을 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워가는 중입니다. 악습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배워가는 중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힘을 내어야 합니다. 그 희망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게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지금의 사람들도 이 기도를 힘들어하지만, 당시의 유다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사람, 즉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특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요.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멀리에서 우리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을 하나하나 챙기면서 벌 줄 준비를 하시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기도하는 정성을 보여야 그 정성에 맞게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하는 분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배워가는 중임을 기억하면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상처를 지혜로 바꾸어라(오프라 윈프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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