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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승국 신부님_나누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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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6-22 조회수108 추천수3 반대(0) 신고

 

초보 수도자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아침 식사는 빵을 위주로 한 식사였습니다. 당시는 어찌 그리 빵이 맛있었는지. 요즘은 식빵 하나에 계란 하나면 식사 끝인데,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도대체 몇 개면 양이 찰까, 한번 실험을 해봤습니다. 다섯 개, 여섯 개, 열 개, 마침내 길고도 긴 식빵 한 줄이 다 사라지더군요.

세상의 빵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늘 부족해 보입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늘 뭔가 양이 차지 않습니다. 한번 배부르게 먹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너 시간 지나면 또 다른 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빵은 이렇게 유한합니다. 세상의 음식은 우선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하지만, 먹는 순간 그때뿐입니다. 돌아서면 그걸로 끝입니다. 인간의 입이란 것이 간사해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잘하는 집, 더 특별한 맛집을 찾아가게 합니다.

세상 것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 눈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입니다. 신기루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피를 양식으로 제공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맛있는 밥상을 한 상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의 재료가 예수님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의 피입니다. 당신의 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우리는 생명의 빵, 생명의 피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성체와 성혈이 정말로 생명의 빵이요 생명의 피로 변화되는 기적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우리의 몸과 피로 이웃들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할 때, 우리가 이웃들에게 헌신할 때, 우리가 이웃들을 사심 없이 사랑할 때, 우리가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참 하느님의 몸과 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만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에서 이웃들의 굶주림 앞에 나 몰라라 할 때,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하지 않을 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을 때,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빵은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지고, 그들에 손에 일일이 건네질 때 참된 성체로 변화됩니다.

쪼개어지지 않는 빵은 참된 빵이 아닙니다. 이웃들과 나누지 못한 음식은 참된 음식이 아닙니다. 쪼갬과 나눔을 통해 빵은 거룩한 주님의 몸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웃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나누어진 우리의 삶은 거룩한 주님의 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빵인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빵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생명의 피인 성혈은 세상의 음료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음료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만드는 영약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훨훨 건너갈 수 있게 하는 금빛 날개입니다.

순교를 목전에 두었던 이냐시오 성인의 증언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세상의 목표도 세상의 왕국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2025년 6월 22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_조명연 신부님 

 

우리는 남 흉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단체의 리더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리더이면서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비판하는 분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본당 신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미국의 한 노동 단체가 스트레스 해소의 장소로 ‘리더 흉보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흉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남을 흉보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일에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남 흉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시각은 어떨까요? 이 역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좋은 점 한 가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부정적 시각의 대부분을 지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특히 리더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나무를 보고 있는 중에도 리더는 숲을 봅니다. 당연히 나를 다른 것을 바라보니 오해를 받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리더의 존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운동경기에 감독과 코치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앞에 나서는 것은 선수이고, 이 선수들만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감독과 코치는 숲을 보면서, 그 선수의 능력을 더 높여줍니다. 이렇게 리더는 한 방이 있습니다.

 

우리의 리더는 누구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인간들의 이런 괘씸함에 당신의 사랑을 접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다가오십니다. 즉, 성체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전해 주십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기에, 주님을 향해 불공평하신 분, 무관심한 분, 자기들의 기도를 외면하는 분이라고 계속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다짐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크기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뒤에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필요한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면 주님께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면,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차피 완벽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테니까(살바로드로 달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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