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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10일 수원 교구청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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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10 조회수46 추천수2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용서와 형제애

 

오늘 예수님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는 말씀으로 복음을 여십니다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악은 늘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이 말씀 앞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는 것은우리도 그런 일을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마음으로 또는 행동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러려니 넘어간다면우리에게는 주님의 불행 선언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그런 일을 저지르는 자!

 

사실이웃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영적인 투쟁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이웃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를 조금이라도 내려놓아야 하니 말대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남을 죄짓게 하는 자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를 단죄하고 계십니다특별히 우리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우리보다 힘없는 사람들그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죄짓지 않도록 또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살펴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외치십니다우리 곁에 이러한 사람들이러한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우리를 이웃 사랑 실천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호소로 다가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사랑으로 가르치셨고사랑으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셨고끝내 부활하심으로 사랑의 승리를 드높이셨던 예수님을 말하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웃은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그러기 위해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야” 하겠지만이에 못지않게 앞세워야 할 모습은 사랑의 행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행위인 용서입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멀리한다는 것은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영적 인식이곧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절실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우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웃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말씀하신다. ① 다른 이를 죄에 빠뜨리지 말라. ②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 ③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에 의탁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1-2절)라고 단호히 경고하신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하지만 다른 이의 발목을 잡아 죄로 이끄는 것은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죄로 이끄는 것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죄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Hom. in Matthaeum 5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신자의 삶이 공동체에, 교회의 증언이 세상에 어떤 본보기가 되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여기서 “일곱 번”은 수학적 횟수가 아니라 끝없는 자비를 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사랑의 최고 증거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네가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 닿지 못한다.”(Sermo 114) 우리가 받은 용서가 크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쉽게 단죄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이미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만 탈렌트”(마태 18,24-28)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기억한다면,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응답이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신다.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힘의 문제이다. 가교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153항) 믿음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동시에 우리가 날마다 응답하며 자라나야 하는 은총의 길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다른 이를 죄로 이끄는 걸림돌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끄는 디딤돌이 되고 있는가? 나는 받은 자비를 기억하며,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는가? 나는 믿음을 내 힘으로 키우려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의탁하며 은총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작아 보여도, 그것이 진실로 하느님께 뿌리내린다면,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용서와 자비의 길, 믿음으로 사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전삼용 신부님_용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우리가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라는 현실의 벽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용서'에 대한 당신의 가정사를 이렇게 나누어 주십니다. 
 
한 신부님의 아버님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옆을 지키는 '아내'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매일같이 성전을 찾으셨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성전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환희의 신비'였습니다.
1단, 2단, 3단을 지나, 4단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함"
어머니는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성껏 아기를 바치는 성모님의
마음을 따라가던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묵상 중에,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에 취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나 '웬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큰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원망할 수 있고, 지치면 이혼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낳아준 자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맡기신 '큰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원망에서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변했습니다.
'상처받은 아내'가 '기도하는 어머니'로 변하자, 놀랍게도 그 가정이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용서에 이른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복수'가 법이자 명예였던 시대였습니다.
가문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를 갚는 것(Vendetta)은 아들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귀족 기사였던 '요한 구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가 정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1028년, '성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좁은 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와 마주쳤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승리에 찬 복수심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의 심장을 찌르면, 가문의 명예도, 자신의 분노도 모두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기도 없이 홀로 있던 원수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온 교회가 "보라, 십자가 나무"를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던 바로 그
성 금요일에, 원수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하며 그의 '믿음'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칼을 든 요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복수하는 자'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자'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차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원수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불가능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일곱 번'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나를 한 번 속인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일곱 번이나 나를 배신하고 돌아와 "미안해, 회개할게"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나'로서는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놀라운 통찰입니다.
그들은 "예, 주님. 저희가 더 노력해서 용서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것은 저희 힘으로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힘, 즉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이 '겨자씨'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체'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심'이 바로 이 뽕나무와 같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이 작은 겨자씨가 내 안에 심기면, 즉 내가 그분을 받아 모시고 '그분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증오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11살의 작은 소녀에게서도 똑같이 증명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그녀는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의 추행을 거부하다가 14번이나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소녀에게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마리아, 너를 찌른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압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압니다. 
 
하지만 이 11살 소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가 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 고레티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녀는 '성체'라는 겨자씨를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알레산드로의 구원을 바라며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가 용서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겨자씨'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증오의 뽕나무를 뽑아내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오늘이 되시기를 빕니다.


이병우 신부님_"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과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고 하시고, '나의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8) 
 
어떻게 너를 죄짓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에게 잘못한 너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완전의 의미를 지닌 일곱 번씩이나. 
 
믿음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한 아주 작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 단순하고도 작은 믿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고, 마침내는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너를 죄짓게 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너를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고,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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