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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은 쉬운 것(부활 5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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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0-05-22 조회수2,422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0, 5, 22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요한 14,21-26 (성령의 약속)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 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묵상>

 

"강론만 없으면 신부 생활 할 만하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강론의 중요성에 비추보면 정말 우스갯소리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가 가끔 현실로 다가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성서 주석서를 보기도 하지만, 강론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저의 경우에(물론 다른 신부님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묵상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 주석과 성서 묵상은 다릅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너무 주관적으로만 성서를 바라보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개인의 생활과 떨어진 죽은 성서 지식에 자족하는 잘못에서도 벗어나 살아있는 말씀으로 성서를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성서 묵상이 강론 준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성서 묵상 자체가 강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복음 묵상'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저의 개인적인 체험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올리는 글들은 성서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 될 수 있으면, 복음을 읽고 묵상하시는 분들의 길잡이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신앙 안에 한 길을 걷는 형제 자매님들께 '복음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생활 안에서 복음을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을 정도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복음 묵상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묵상한 것을 글로 올리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복음 묵상을 이렇게 '매일 공개적으로 올리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혼자 보는 공책에다 적는 것은 크게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읽는 분들을 생각해서 말이 되게끔 올려야 된다는 부담, 어느 정도 객관성도 지녀야 한다는 부담, 또 같은 이야기를 계속 올려서도 안된다는 부담 등등 여러 가지 부담이 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신부님, 대단하군요. 매일 복음 묵상을 올리시니까 말이예요."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나의 묵상 내용이나 글이 좋다라는 뜻이 아니라, 겁없이 올리는 나의 용기가 가상하다는 뜻이겠지"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복음 묵상을 글로 올리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묵상한 것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될뿐더라, 막상 글로 올리려고 하니 막막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는데, 제 정신이 산만한 탓인지는 몰라도, 성령께서 크게 도움을 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과연 무엇이 내가 지켜야 할 예수님의 계명인지 생각해봅니다. 요한 복음 13,34-35의 말씀을 떠올리기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묵상이 오늘 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용기를 줍니다. 부족한 제가 보잘 것 없는 복음 묵상을 매일 올리는 것이, 제가 벗들에게 할 수 있는 작지만 구체적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만 둘까'라고 몇번씩 먹었던 마음을 접고 용기를 내어 이렇게 올립니다.

 

오늘은 정말 별 내용이 없네요. 그래도 어느 때보다 더 솔직했다는 생각으로 자위해 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벗들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생활 안에서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해 보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는 생각합니다. 하물며 주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려는 신앙인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이겠지요. 분명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 안에서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찾고 보다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겠지요.

 

이번 한 주간 주님 안에서 함께 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나누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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