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용서받은 기억(연중 19주 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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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8-17 | 조회수2,446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2000, 8, 17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마태오 18,21-19,1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하늘라는 이렇게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묵상>
어제는 두 달만에 고해성사를 받았습니다. 모든 성사가 은총이 충만한 아름다운 것이지만, 고해 성사가 특히 그러하다는 체험을 가끔씩 합니다. 용서하기는 어려워도 용서받고 싶은 것이 저의 인간적인 심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을 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누군가가 구렁텅이에서 건저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용서이지요. 선뜻 용서를 청할 용기는 없지만 누군가 용서를 해 준다면 하늘을 날듯이 기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 체험의 자리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죄 고백이 끝난 후 사제는 보속을 주고 사죄경을 외웁니다. 그리고 파견을 하지요.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언뜻 보면 별 의미없는 마침 인사 정도로 들리기도 하지만,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만약 이런 경우가 있었다면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죄를 용서받았는지 아닌지 의심이 가는 경우일 겁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과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두려워 용서받았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음을 아시기에 조건없이 용서를 베푸시지만 인간적인 조건에 얽매여 살아가다 보니 용서를 체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자신도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한번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의 사슬을 끊고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파견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펴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 죄로 물든 세상 안으로 말이지요. 용서를 통해 죄를 녹이라는 사명을 받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처럼 그렇게 용서하십시오."
사제의 파견 인사는 바로 이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이 말씀처럼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많이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용서에 대한 강한 체험이 부족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주님의 용서에 대한 체험을 잊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았음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도 자주 용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가끔씩 용서받은 기억을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 단지 그 순간의 기쁨이나 평화로 돌아가 머물고자 함이 아닙니다. 용서할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용서받은 순간의 말 못할 기쁨을 항상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통해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받은 기억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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