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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중규 | 작성일2000-12-07 | 조회수2,159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죽음과 부활 정진홍/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성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들은 이 날을 예수라는 사람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날이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경우, 이러한 ’고백’은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고백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실재와 관련된 발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만 진실한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진실한 발언은 없습니다. 또 진실하기 때문에 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모든 고백이 그러합니다. 성탄절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고백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백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전달가능한 선언이 되어야 하는 일인데 그러자면 다른 수가 없습니다. 그 고백의 내용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뜯어 알게 하기보다 느껴 감동하게 하는 내 생활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생활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도 익히지 못해 제대로 복음적인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부하는 종교학의 울 안에서 새삼 그러한 삶의 본디 틀을 가늠할 수 있는 일들을 만나 그러한 자료를 통해 이 주제를 풀어보고 싶습니다. 자연히 무척 주제를 우회하여 접근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음식문화와 종교라는 주제로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문화권의 식생활 문화를 살펴보았고, 어떤 규범과 형성원리가 그러한 먹이문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기 저기 뒤져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새로운 많은 사실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음식을 먹고 사는 일이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대단한 윤리가 그 문화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에 대한 금기가 없는 문화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러한 금기는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계율이기 보다 일정한 질서를 사회생활 속에서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설정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먹이 생활의 질서는 삶의 규범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간과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하는 자책이 짙게 솟았습니다. 배고픈 상황 속에서는 도무지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탐하고 먹지 못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면서 착취와 수탈, 불의와 부정을 낳고 있는가 하는데 이르기까지 먹이문화의 기본질서에 대한 감각이 너무 한심하게 둔화된 우리의 현실이 아프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먹는 일은 언제 어느 문화권에서나 하나의 축제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발견하였습니다. 홀로 먹는 일, 그것처럼 못된 삶은 없습니다. 더구나 먹이는 혼자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럿이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먹이의 나눔과 공유, 이보다 더 근원적인 윤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은 제법 사람다워집니다. 음식의 지나친 저장은 반드시 부패에 이른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습니다. 요즘은 저장법이 발전되어 썩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며 자기 곡간에 가득가득 먹이를 채워 넣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이의 부패현상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곡간에 있는 먹이는 방부제를 통해 썩지 않을지 몰라도 바로 그러한 욕심스러운 일이 그가 속한 모든 공동체를 부패하게 하는 일은 지금도 옛날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문화의 다양성을 살펴보면서 그 살핌은 그대로 지금 내게 쏟아지는 심판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감동은 음식기원신화들과 만났을 때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예를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추려 이야기한다면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가 이렇게 감자라든가 옥수수라든가 쌀을 주식으로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음식기원신화는 한결같이 사람의 먹이란 곧 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예를 하나만 도식화하여 들면 이러합니다. "옛날 옛날에 어느 부족이 배가 고팠다. 곡식도 나지 않고 나무 열매도 없고 잡아 먹을 짐승도 없어 사람들은 거의 굶어죽게 되었다. 매일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하느님께 먹을 것을 주십사고 빌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느 아침, 그들은 자기 무리 속에 이제까지 없었던 낯선 묘령의 여인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낯선 이 여인을 잡아 먹기로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침내 그 여인을 먹이로 하여 포식하고는 뼈와 내장을 여기 저기 버렸다. 그런데 그것들이 버려진 자리마다 그들이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솟아났다. 그들은 그 후로부터 그 식물의 열매를 먹으며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은 그 여인이 바로 신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고, 모든 먹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신의 주검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고백입니다. 먹이를 신이라고 고백한 인간의 아득한 경험, 그러므로 먹이는 신의 주검이라고 알고 살았던 그 아득한 사람들의 삶의 체험, 그것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곧 먹이 기원신화는 인류의 온 문화권 어디에나 퍼져있는 보편적인 내용입니다. 그 얼개가 다르고 캐릭터가 다를 뿐 그 내용의 틀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다듬으면 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생명은 먹어야 지속합니다. 먹는 일처럼 근원적인 것이 삶에서 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먹으려면 우리는 죽여야 합니다. 먹이는 모두 본래적인 의미에서 주검입니다. 동물을 먹이로 하는 경우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식물을 먹이로 할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생으로 먹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그것은 먹는 순간 죽습니다. 온갖 먹이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살아있던 것의 주검이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우리를 전율케하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도대체 생명은 생명을 죽여 비로소 지탱하는 괴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삽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죽기까지 한시도 거르지 않고 우리는 생명을 죽여 먹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다른 것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 삶의 아득한 선배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먹이는 하느님의 주검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이러한 고백은 신성모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외람됨이 더할 수 없는 못된 발언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적어도 신을 운위할 때면 그 분의 절대적 권위를 승인합니다. 그 존재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르고 옳은 삶이라는 사실도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인간이면 이렇게 저렇게 서로 다른 표현으로 그 사실을 마음에 품고 있지만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감히 먹이란 그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어 남기신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백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가장 근원적인 일인 먹는 일과 먹이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람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더 할 수 없는 감격의 극에서 이루어진 고백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이보다 더한 감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살 수 있도록 내 먹이가 되어주신 하느님!", 이렇게 말하는 것 보다 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말입니다. 음식기원신화가 이러한 감사로 한결같이 채색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나아가 음식윤리의 분명한 원리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전체적인 윤리의 기저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아울러 보여줍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처럼 죽는 일입니다. 뭇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먹이 되어 죽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죽음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른지 아무도 모릅니다. 부활을 바라고 죽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연극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너를 위해 먹이되어 죽으마, 그러나 곧 나는 다시 살아날거야!" 이것은 좀 치사한 일입니다. 내가 다시 사느냐 죽어 없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분명히 아는 것은, 다만 내가 죽어 먹이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살게 된다는 사실 뿐입니다. "내가 죽어 네가 사는 삶", 그것 이상도 아니고 그것 이하도 아닙니다. 도대체 삶의 원리가 그러한 판에 그것이 커다란 덕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가는 것이 삶이니까요. 결국 성탄절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죽여 먹이되어 사람을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내가 먹는 먹이가 하느님의 몸임을 새삼 확인해야 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주검을 먹고 겨우 삶을 지탱하는 우리가 내 삶을 다른 사람의 먹이로 제공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임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성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공연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분명한 것은 온통 생명이 생명을 죽여 사는 이 현실 속에서 내가 죽지 않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도 살리지 않겠다는 고집일터인데 바로 그것이 죄이지 무엇이 죄인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의 수많은 아이들의 죽음과 더불어 일어났을까 때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 아이들의 죽음이 곧 하느님의 죽음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상상조차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죽음을 살지 못한 회한에 가슴이 찢어지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이 마음에 올해도 성탄은 어김없이 찾아와 그 아픔을 더 없이 고통스럽게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잘 믿는 것인지.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하느님의 주검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끄럽지만 이번 성탄절에는 이 사실만은 분명히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빙그레 웃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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