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제 답은 찾았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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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3-20 | 조회수2,601 | 추천수32 | 반대(0) 신고 |
터널의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그 어둠의 망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일에 매진하게 되어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나를 엉겁결에 번역하고 이제 교정을 끝내고 인쇄에 넘기게 되었다. 그 은덕인가, 이제 그 답을 알 것 같다.
내가 왜 나를 미워하여 비겁한 짓을 한다고 여긴 그 한 형제에 매여 있었단 말인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단 말인가? 심지어 베드로 사도도 똑같은 고민에 빠졌었는데 나라고 그 미움의 고민에 빠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자 공동체의 맏형으로서 베드로가 겪었을 어려움을 생각해 본다. 나이가 있어 형이 되었지만, 능력은 그만큼 못따라 주었다. 배운 것이라곤 고기잡는 것 밖에 없었고 시골 출신이라 그리 약삭빠른 형이 못되었다. 그래서 도시 출신의 모 형제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시비를 따지는데만 급급한 동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깐깐한 비판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말로써는 질 수밖에 없으니 끽 소리 못하고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던 베드로도 참을 데까지 참다가 도저히 못참겠다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말씀드린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하면 도데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이면 되었지요? 이제 한번 퍼붓고 한대 때려줘도 되겠지요? 도저희 못참겠네요. 보자보자 하니, 내가 나이가 지보다 적나, 그래서 윗사람인데... 그럴 수가 있나요?>
주님은 허허 하시며 너털웃음만 지으시다가 <베드로, 그렇다면 진작에 한대 쥐어박지 뭐할라고 지금까지 참았냐? 지금 한대 쥐어박으면 참아왔던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니? 야, 참을라면 끝까지 참아버려!>
그렇다! 나는 크게 두번 참았다. 물론 소소한 것까지 따지면 일곱번 쯤 되겠지만 내가 상처를 입은 것은 두번 정도이다. 베드로보다도 덜 참았다. 주님도, 나를 보고 너털 웃음을 지으신다.
......
아나니아와 아자리아와 미사엘은 불가마 속에서도 꿋꿋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다! 행복하고 기쁜 중에만 아니라 시련 중에도 그분은 나와 함께 계셔주셨고, 늘 그러하시다. 그런데 그 하느님을 내가 발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내가 겪는 시련은 기쁨 중에 참아받을 수 있는 십자가가 되기도 하고 지옥같은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오늘 아침 미사중에 나는 그 하느님을 보았다! 나와 함께 계신 그 하느님을! 그분은 나와 함께 울고 계셨고 또 나와 함께 미소짓고 계셨다. 그래, 이제 답을 찾았다! 훌훌 털고 터널을 빠져나가자. 저희 희미하게 나마 빛이 보이지 않는가? 터널의 끝이 다 되었다는 표시이다. 그 빛은 새로운 빛이리라.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했던 그 <어둔 밤>을 겪은 영혼이 누리는 그 빛 말이다. 이제 그 빛을 더욱 깊이 감사하리라. 한 동안 눈을 감고 그 빛을 음미하리라. 새로운 부활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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