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야곱의 사다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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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도행을생각하는모임 | 작성일2001-07-05 | 조회수2,74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야곱의 사다리
야곱이 꿈을 꾸었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사다리가 놓이고 흰옷을 입은 천사들이 그리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 모든 이가 꾸는 꿈입니다. 그 하늘이 어떤 이에게는 돈이고 명예일 것입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나 서방정토일 겁니다. 또는 미국 연방청사를 폭파하여 백수십 명을 죽게 만들고 사형을 당한 맥베이 같은 청년에게 저 하늘이란 바로 자기 운명의 주인인 자기 자신을 뜻했습니다.
나도 가끔 꿈을 꿉니다. 그 꿈이란 것이 대개 서너 가지가 반복되곤 합니다. 그 꿈 하나의 무대는 언제나 어린 시절 친구네 집 파란 대문으로 올라가던 계단입니다. 그 위에 서서 발을 구르면 내 몸은 어느새 둥실 떠올라 흰구름 사이를 훨훨 날아다닙니다. 사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아직도 더 클 키가 남아있나 봅니다.
그 꿈 둘은 시험 치는 꿈. 끝 종이 울리고 선생님은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라시는데 내 답안지는 하얗게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괴로운 꿈은 영벌(永罰)에 처해지는 꿈입니다. 너무도 끔찍한 곳을 허위허위 돌아다니다가 그분 앞에 서니 나더러 지옥으로 가라십니다. 깨어나서도 한동안은 몸서리가 처지는 무서운 꿈. 이 땅에서의 실수는 만회가 가능하지만 마지막 심판 날에 너는 저 끔찍한 지옥으로 가라는 선고를 받으면 얼마나 막막할 것입니까.
사실 스승님께서도 아버지께서도 당신 제자며 자식들을 그리 무섭게 내치실 리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도 모두 당신 품에 거두시리라 나는 믿습니다. 살아있는 이 몸뚱이도 분자, 원자로 쪼개고 또 쪼개면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다는데 그리고 죽으면 당신 품으로 돌아갈진대 천당 가고 지옥 갈 내가 따로 없음입니다.
그런데도 영벌에 처해지는 꿈을 가끔 꾸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이땅에서 잘먹고 잘 지내다가 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히 잘살리라.’밤길을 홀로 걸을 때 또는 산골 빈집에서 밤을 새울 때 와락 무섬증이 이는 것도 다 이 ‘나’의 안녕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됨이니 이 모두가 밤과 나, 처녀귀신과 나를 구별하는 분별심에서 시작되는 괴로움입니다. 남이 나를 욕할 때 화가 솟구치고 남이 나를 칭찬할 때 즐거워지는 것도 모두 남과 분별되는 ‘나’를 사랑하는 자애심에서 그리 됨이니 아직도 내 갈 길이 멀고 험합니다.
이 삼라만상[색·色]은 다 아버지[공·空]의 드러나심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문자에 집착하는 이들은 범신론이라고 이단이라고 편가를지도 모르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겝니다. 아버지께서 이 삼라만상을 지으셨으니 이 색의 세계는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더라. 음식의 달콤한 맛이며 귀를 울리는 즐거운 음악이며 남녀간에 나누는 운우지락이며 어느 것 하나 아버지 보시기에 나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선악과 따먹고 시비와 선악을, 그리고 너와 나를 구별할 줄 알면서부터 아버지 주신 이 아름다운 알몸이 부끄럽고 사람이 만든 옷은 예의바르다고 헛소리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슬프고도 슬픈 일입니다. 아버지 주신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잃어버리고 사람이 이 머리로 무엇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땅과 하늘이 벌어지고 성과 속이 나뉘고 ‘너‘ 위에 우쭐대는 ‘나’가 생겨나니 이 아니 원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야곱의 꿈속에서 보여주신 사다리는 이 갈라짐, 분별을 이어 하나 되라는 가르침의 표징입니다. 하늘과 땅이,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와 비존재가, 너와 내가, 색과 공이 하나 되는 사다리. 그 야곱의 사다리는 이 ‘내’가 김 아무개라는 자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원히 구원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결코 아닙니다. 본디 야곱도 없고 나도 없고 아버지만 계시니 달리 아버지께 올라갈 사다리도 없습니다.
요즈음 책방엘 가보면 7일 만에 가야산에서 나를 버리는 수련을 마쳤다느니 기를 단련하여 우주와 통하게 되었다느니 하면서 도를 통하고 해탈을 바라는 이들의 눈길을 끄는 책들이 널려있습니다. ‘7일’이니 ‘비법’이니 하는 말부터가 ‘나’를 놓는 일과 한참 거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죽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저 멀리 인도 땅에서가 아니라 매일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하는 이땅 한가운데에서 평생을 실천해 가야 할, ‘나’를 놓고 남과 아버지와 하나 되는 도리를 ‘7일’ 만에 무슨 특별한 비법으로 마스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런 말씀을 들었노라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배를 고프게 하시는 분은 그 어미의 젖을 채워주시기도 한다. 그분은 자신의 일을 완성되지 않은 채로 그냥 두시지 않는다.”어린아이가 배고픈 것도 마귀의 짓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가 펼치신 이 세상의 이치요 그 어미의 젖을 채워주심도 그분의 섭리라. 비노바 바베는 어디 달리 배도 고프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찾아다니지 않고 배고픈 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가난한 인도 땅을 아버지의 나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배고픈 아이 배불리려 부자들 찾아다니며 땅을 기부하게 해서 부자와 빈자가 배부른 하나가 되도록 수십 년을 맨발에 밥그릇 하나로 떠돌았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눈 속에서 홀로 자기를 버리고 해탈한 사두들과는 달리 밑바닥 인생들 속에서 똥 푸고 물레 돌리며 살다가 “나의 의무는 다 이루었다.”며 팔십육년의 삶을 온전히 아버지께 바쳤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무슨 성인성녀로 세상에 이름을 올린 적이 없는 시골 아낙이었지만 밥 굶는 학생 데려다 따뜻한 밥 먹이고 제 아들에게는 식은 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차별에 항의하는 어린 비노바에게 이리 말했답니다. “너는 나에게 사랑스런 아들이고 그 학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으로 생각하려 애쓰고 있다. 내가 너마저 내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때가 오면 이런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우리 스승 예수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시면 분명 천사들이 받아 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나’를 부인하셨고 산에서 모세 엘리야를 만나시고도 이 잔인한,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인 땅으로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잃고 우는 과부, 배고픈 이들,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시고, 이 고통의 바다를 아버지의 나라라 부르시고, 종래에는 도둑들과 함께 도둑들처럼 십자가의 수치 속에서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랍비나 사제처럼 유식한 책 한 권 남기지 않으셨으나 그 일과 행동으로 아버지의 뜻만 행해 보이셨습니다.
야곱의 사다리. 이 고통스럽고 마음에 안 드는 이 땅에서 근심, 괴로움, 눈물이 없는 저 천국으로 ‘나’를 올려주는 야곱의 사다리. 흰옷 입은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그런 사다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땅과 저 천국이 하나요 슬픔과 괴로움 가득한 지금 여기가 바로 당신의 나라입니다.
아이를 배고프게 하는 이도 당신이시요 그 어미의 젖을 채우시는 분도 당신이시니 우리는 열심히 배고픈 아이의 어미젖을 채우는 당신의 일에 몸바칠 일입니다. 그러노라면 자연스레 ‘나’도 사라지고 아버지도 나도 배고픈 아이도 어미도 하나일 것입니다. 야곱의 사다리, 바로 스승님이 몸소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김형태 요한 / 변호사 경향잡지 7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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