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죽어도 여한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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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7-13 | 조회수2,911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이스라엘(야곱)은 마침내 잃었던 아들 요셉을 만나 목놓아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를 보았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가끔 어르신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만족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나 또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충족되어야 할까요?
물론 야곱처럼 잃었던 자식을 다시 보게 된다거나 고질병에 걸린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거나 어렵게 가정 경제사정이 일시에 확 풀려나게 되었거나 내 맘을 늘 아프게 하고 가슴에 멍이 들게 했던 바로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을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우리의 신앙생활과 특히 기도생활은 바로 이러한 것의 치유를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진정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곱이 <이제 너를 보게 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듯이,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보게 되었으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치 그 옛날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나뵙고 노래한 것처럼, 우리도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고 노래해야 하리라.
오늘도 그분은 당신 자신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미사성제 안에서 특히 성체를 통해서, 말씀 안에서, 만나는 형제 자매들 안에서... 그 주님을 만나뵙고서야 우리 또한 <주님, 이제 더이상 바랄 나위 없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
때로 삶이 귀찮고 힘들어서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는 말과는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똑같이 죽음을 원하지만 그 동기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말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이란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꺼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그분을 뵙고, 아니, 구원을 뵙고, 아니, 참 행복을 뵙고, <이제 더이상 바랄 나위가 없다>는 뜻에서 우리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죽어야 할 인생, 부정적인 의미에서 삶의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포기를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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