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랑의 포로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단식(斷食)들 하시나요?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09-07 조회수1,725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 22주간 목요일 말씀(골로 1,9-14; 루가 5,1-11)

 

몇 해 전인가 EBS에서 뻐드렁니가 정다운 ’웬디 베게트’ 수녀님의 구수한 해설에 빨려들듯 미술 작품을 감상하던 맛이 기막혔는데 그것이 책으로 나와 머리맡에 두고 심심하면 한번씩 펼쳐보곤 한다. 오늘 말씀을 보니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 사도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엘 그레코’의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생각이 났다.

 

지적이면서도 정력적인 활동가였던 바울로 사도의 검은 눈동자는 그림에서도 복음전파의 열망으로 이글이글 불타 오르는 것 같다. 옆에는 흰 수염이 온화해보이는 베드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부탁 말씀(요한 21,15-18)을 들을 때처럼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인자한 눈으로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의 손은 거칠고 검게 그을려 그가 전직 어부였음을 나타내주고, 희지만 힘이 있는 바울로의 손은 성서를 짚고 있으며 다른 한손은 이제 막 설교를 시작하려는 듯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스캐너 없는 것이 한이다.)

 

두 사도의 대조적이면서도 비슷한 면이 무척 조화롭게 보이는 그림을 보며, 두 사도가 충돌했던 ’안티오키아 사건’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떠오른다.(갈라 11, 14참조) 그러면서도 한번 마음을 주면 온몸을 불사르는 단순하고 정열적인 면에서, 곧잘 흥분하여 감정을 나타내 는 다혈질이라는 점에서, 두 사도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의 말씀이 사도의 친서인지 아닌지의 논란은 그만두고, 바울로 친서들에서 보이는 넘치는 복음전파의 열정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수도 없이 넘나들었던 타우르스 산맥과 소아시아의 드넓은 벌판들, 그리스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들을 몇 날 몇 일 버스로, 비행기로 다녀보며 느꼈던 벅찬 감격들이 다시 되살아난다.

 

그 먼 길을, 그 고난의 여정들을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게 그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그를 사로잡았던 생각들은 무엇이었을까?

 

배를 가라앉일 듯한 기적의 힘 앞에 오도가도 못하고 잡혀버린 베드로, 그물에 잡힌 것은 실은 물고기가 아니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었다. 수난 예고를 듣고 또 한번 발을 빼려 했지만 그 역시 실패로 끝났고, 아무도 잡지 못할 마지막의 결정적인 기회마저 예기치않은 닭 한 마리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갈만큼 그는 자유로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를 묶어놓은 그물은 무엇이었을까?

 

엘그레코의 그림의 베드로는 우수에 찬 눈동자로 그것은 ’사랑의 그물’이었다고 들려준다. "사랑의 포로! 세상 사람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모두 건져 내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내게로 데려오라"는 주님의 눈동자도 그 날 그렇게 젖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무엇으로 사람들을 낚을 수 있는가?

유창한 말이 아니라, 정열적인 활동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삶이 회개로.... 사랑으로.... 감염된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을 비로소 전염시킬 수 있다는 비법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게서 발견한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