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난의 기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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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09-12 | 조회수1,71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 23주간 수요일 말씀(골로 3,1-11; 루가 6,20-26)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설교하셨다하여 ’평지설교’라 이름 붙인 대목이 오늘과 내일의 복음이다.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자연스럽게 비교해서 보게 되는 이부분은 두 복음사가의 신학적 특징이 확연히 비교되어 드러나 더욱 흥미롭다. 요컨대 같은 말을 들어도 옮기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말을 전하는 이의 관심과 생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산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법령을 반포하시는 준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며, 평지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하고 쇠약한 이들을 위로하는 따듯한 어머니의 모습이시다. 산과 평지라는 장소의 설정도 우연하지 않은 듯, 마태오를 읽고 있으면 정신과 마음이 모두 고양되어 주님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는 거룩한 체험을 하게 된다. 반대로 루가복음을 읽으면 가난하고 소외되고 잊혀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따듯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 편안히 눕고 싶어진다.
두 복음이 같이 전해 내려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산이라 하는 주님이 제시하시는 이상향과 나(평지)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겸손되이 아버지의 이끄심에 전 존재를 맡기면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을 잡고 걸음마를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둘지 않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으니...
루가복음에서 행복 선언을 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도, 지금 우는 사람들도 모두 실질적으로 배고프고 슬프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이 당신의 나라를 선사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한 편이 되어 계시는 하느님! 그런데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압구정동에 가보면 나는 가난하다. 달동네에 가면 나는 부유하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러니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기준은 아닐 것이다. 성 크리소스토모는 "가난한 사람이란 소유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는 선사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루가복음사가에 의한 또 하나의 작품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단다.
자발적으로 재산을 희사하여 공동으로 생활함으로써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라"는 신명기의 정신을 실현해 나갔던 사람들. 그들과 같이 자신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내어 놓아 실질적인 형제애를 실천해나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 나라는 선사된다는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세례성사로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 독서는 이야기한다.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끊임없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나’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한 산(山)은 너무도 요원한 듯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낡은 인간의 흉허물을 하나씩 둘씩 벗어나가는 것이, 나의 소유들을 하나씩 털어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나의 할 일이라는데야 어쩌겠는가? 올라가 보는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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