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백팔번뇌의 인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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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9-15 | 조회수1,760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 했던가! 참 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짧디 짧은 행복의 순간에 길고 힘든 고통의 세월인 것같다. 사랑의 행복도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늘 잉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고통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는 것같다. 예수님마저도 성모님마저도 그 어떤 성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나의 고통과 아픔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통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이다.
병자성사를 위해 혹은 봉성체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면 환자들의 상태는 각양각색이다. 특히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암환자들은 많은 경우 어둠과 고통, 절망 가운데서 보내는데 간혹 너무도 밝고 희망차게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들을 보기도 한다. 고통의 상태는 같은데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나라면 죽음 앞에 이르러 어떠할까도 생각해 본다.
불가에서는 이 번뇌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 번뇌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허상이기에 그 고통 또한 허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떠한가? 고통은 은총이란다! 고통의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신비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가의 해법은 부정의 방법이라면 그리스도교의 해법은 긍정의 방법이랄까...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은 없어져야 할 무엇이 아님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고통은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이 고통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 된다. 죽음의 병을 받아들이고 찡그리고 있는 환자들은 나는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병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못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기쁨이 현실이듯이 고통도 엄연한 현실임을 기꺼이 인정하지 않고서는 해법을 찾을 길이 없다.
두번째는 어짜피 고통이 현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는 고통이 더이상 고통이 아니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는 죽음이 더이상 죽음이 아니다. 예수의 고통, 성모님의 고통이 그렇지 않은가!
세번째는 이렇게 기꺼이 받아들인 고통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자. 나의 고통은 그 이유를 명백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의 고통이 분명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어보자. 예수님의 고통이 온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면 성모님의 고통 또한 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필연적으로 겪어야했던 것이라면 나의 고통 또한 적어도 세상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의 구원을 위해 아니면 다른 영혼(특히 죄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대신해서라도 꼭 겪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해야만 나의 고통은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어짜피 겪어야 할 고통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라 유익하고 보람있는 고통이라면 한번 겪어볼 만하지 않겠는가!
오늘 내가 겪고 있고 또 겪게 될 고통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주님께 봉헌해 보자. 그 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과 성모님의 가슴을 예리한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오, 백팔번뇌의 인생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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