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설픈 사랑 고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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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09-28 | 조회수2,04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말씀(하깨 1,15-2,9; 루가 9,18-22)
어제는 ’아무도 예수에 대해 정의(定意) 내려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은 꼭 필요하며 될 수 있는 한 자주 고백해야함을 말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하고 생활 속에 부딪치는 사건들 속에서, 성서를 읽으며 물어 볼 때마다 오히려 그분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이럴 때, 가끔은 우리가 생각해도 깜짝 놀랄만큼 그럴듯한 대답을 자신도 모르게 한 적도 있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 사도도 그랬나보다.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시며 베드로의 미숙한 그리스도관을 바로잡아주셨다. 즉 베드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르꼬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이를 만류하다가 ’사탄’이라는 엄청난 꾸짖음을 받았으나, 루가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아예 빼고 제자 모두에게 ’그들을 나무라시고’(원문에 더 가까운 새번역 참조)로 부드럽게 바꾼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베드로사도의 권위에 손상이 갈까봐 그랬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에 덧붙여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무리 엉성하고 어리숙해도 즉 그분의 정체성의 일부만 발견하고 파악했다해도, 주님은 그것을 받아들여주시며 부드럽게 수정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것이 설사 잘못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사탄’이라는 가혹한 꾸중으로 질책하시지는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세심하고 따듯한 루가는 주님의 나무람을 덧붙이며, 전광석화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마태오 복음의 예수의 칭찬 참조) 기막힌 고백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만 정의 내리고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됨을 이야기하려는 것같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이 자라고 체험이 늘어나며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넓어짐에 따라서 같이 자라고 성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라는 명사(완결의 이미지)를 쓰지 않고 ’믿는’, ’믿는다’, ’믿어서’....등의 동사의 활용으로(진행의 이미지)만 쓰는 것이 아닐까? 요한 복음은 점차 단계가 높아가는 ’점진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이다. 마치 태생소경의 눈이 점차적으로 뜨여서 신앙의 눈까지 떠지게 되는 것처럼....
사실 오늘 독서의 하깨 예언자도 ’즈루빠벨’이 메시아인줄 알았다. 그 윗대의 사람들은 페르샤의 왕 ’고레스’를 메시아로 보기도 하였다. 심지어 신약의 ’세례자 요한’도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리스도’냐고 물었다. 누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선행과 수덕,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의 이해가 보다 넓어지고 믿음이 성숙되어 나간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믿음이 더 깊어지면 질수록 그에 걸맞는 신앙고백들이 우리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 어설픈 사랑의 고백들을 기꺼이 즐겨 받아주시면서도, 그 순간에만 만족하여 머물러있지 말라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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