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인, 무조건 온순해야하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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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11-22 | 조회수1,89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 33주간 목요일 말씀(2마카 2,15-29; 루가 19,41-4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공포 정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종교적 탄압이 확산되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조그만 도시 모데인에서 혁명의 불꽃은 뜨겁게 타올랐다. 시리아군 장교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교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했을 때 그 마을 사제인 마따디아는 시리아 장교와 이교제사를 드리던 유다인을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들 다섯과 충실한 유다인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해 달아나버렸다.
이후, 그들은 인원과 무기가 부족했지만 게릴라 전법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들의 무기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으며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려는 충성심이 일당백의 열전을 가능케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불타는 저항정신을 잘 표현한 말이 ’망치’라는 ’마카베오(maccabeus)’라는 칭호일 것이다. 타협주의자들이나 압제자들을 망치처럼 내리쳤다는 뜻에서 큰아들 ’유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예수께서는 오늘 아름다운 예루살렘의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은 이곳과 요한복음에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이다. 모든 인간의 불행을 측은하게 여기시며 슬픔을 느끼셨지만 그중에서도 인간 조건의 한계 상황인 ’죽음’ 앞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예상되는 한 ’도시의 파괴’ 앞에서는 깊은 탄식과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없으셨을 것이다.
무엇이 주님을 울게 하였을까? 끝내 회개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한 고집이 아닌가? 인간이 끝내 울지 않기에 하느님이 울고 계신 것이다. 인간이 깊이 탄식하지 않기에 하느님 자신이 탄식하고 계신 것이다.
마치 홍수를 결정하시면서도 후회하시고 탄식하시는 것처럼... 그리고나서도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모습과도 같다. 인간이 후회하고 탄식하고 다짐하고 약속해야할 몫을 전능하신 하느님이 대신 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도시와 성전 모두 파괴되고 만다. 그것을 루가복음사가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징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평화(살롬)’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의 운명. 이천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고 있으니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는 ’평화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의 모습은 늘 온순하고 따듯하고 겸손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성화상이나 우리의 마음 안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일생을 하느님의 뜻과 사랑의 계명을 위해 유혹을 물리치고 불의와 싸우고 백성을 오도하는 기득권층과 불굴의 정신으로 투쟁하시던 단호하고 지엄한 모습이 더 많았음을 기억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아무에게나, 무엇이든지 늘 복종적으로 온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처럼,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서 용감한 의지를 발휘해야 하면서도 마음 안에는 늘 자애로운 주님의 사랑이 철철 넘쳐흘러야 한다는 오늘 말씀이 아닐까?
다시는 주님이 우리 대신 울지 않도록 잘 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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