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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리 '성탄'이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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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12-07 조회수2,021 추천수4 반대(0) 신고

대림 제 1주간 금요일 말씀(이사 29,17-24; 마태 9, 27-31)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데 소경 두 사람이 졸졸 따라 오는 것이다. 그것도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예수께서는 얼른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고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모른척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집안으로 사라지시기까지 한 두 번 이야기하고 말았겠는가?

 

그들은 염치도 없이 예수께서 들어가신 집까지 따라 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영향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 사람의 스케줄을 알아내고 무슨 습관이 있는지 취향은 어떤지 어디를 잘 가는지 면밀히 조사해두고 그 사람과 마주치기를 의도적으로 시도한다. 말하자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려고 면밀하게 계획을 짜는 것이다. 목표가 간절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자신의 의도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집요한 그들의 의도는 마침내 예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죽하면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느냐?" 하고 물으셨으랴? "예, 믿습니다. 주님." 그렇게 염치불구하고 쫓아다닌 이유는 바로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고있었기 때문이었음을 밝혀주는 대답이다.

 

이에 ’눈을 떠라’ 하시지 않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예수께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 아니신가? 그들이 만일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긴가민가했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눈이 뜨인 것을 보면 ’당신은 전능하신 주님, 나의 눈을 뜨게 해주실 분이십니다’ 라는 확고한 믿음이 마음 안에 있었음을 역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그들은 육으로는 소경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더없이 밝은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도 그렇다면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확고한 믿음의 소산임을 알 수 있겠다.

 

영적으로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적으로는 암흑 속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육적으로는 정상이면서도 영적으로는 캄캄한 어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 어느 한부분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모든 것은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치유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훌륭한 신앙인은 현실을 배척하고 세속과는 거리가 먼 고고한 사람들이라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지상의 삶이란 단순히 천상의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정거장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현실적인 분이 없다. 그분은 적극적으로 현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분이며 그분의 첫마디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였다.

 

이미 영적으로 당신을 알아보고있는 그들이라 세상 것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눈을 밝혀주시는 의도 안에는 구체적인 세상의 현실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말씀은 아닌가? 지상의 현실적 삶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배제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육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의도대로 살맛나게 꾸며야 할 낙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독서에서는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고, 캄캄하고 막막하던 소경도 눈을 환희 뜨게 되는 세상이 찾아온다고 예고한다. 천대받는 자들이 마냥 기쁘게 되고, 빈민들이 흥겨워할 세상, 정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고 나쁜 일을 찾아다니던 자들이 갈데 없는 세상이 되리라 예고한다. 아, 그런 세상에서 한번 살고싶은 것이 소원이다.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믿느냐?" 하고 예수께서는 오늘 졸졸 쫓아다니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는 늘 "예, 믿습니다. 주님"하고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들이 가까운 주위에서부터 구현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다음에, 주님이 최종적으로 오실 날에는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도 없고 이룰 필요도 없다. 이미 그분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오늘 주님은 소경들의 <육적인 눈을> 온전하도록 떠주며 여기서 먼저 할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닐까?

 

대림기간이라 해서 주님의 탄생을 꼭 몇 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고 먼 산을 보고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복음은 언제나 ’오늘’ ’여기서’ 복음을 듣는 자들에 의해서 탄생되고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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