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절에 관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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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 준균 | 작성일2001-12-07 | 조회수2,28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안녕하십니까? 이준균 요셉입니다.
약 2년전부터 묵상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도 됩니다. 특히 신부님들의 글에 많은 감동을 받았읍니다. 우리하고 꼭 같은 고민을 그분들도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는 거지요.
최근 묵상글들을 읽다가 오늘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주제넘게 글을 쓰게 되었읍니다. 혹시 제 글이 적절치 않다 생각하시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형제간의 평화와 이해를 유지하자는 것이지요. 논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쌀단지’는 그렇게 왈가왈부해야할 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글이며 그 글을 읽고 저 역시 저의 생활을 되돌아보게 되었읍니다. 양승국님의 글을 계속 읽어오셨다면(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구절구절 분석할 필요가 없는 글입니다. 그냥 한입에 삼키면 되는 그런 글이지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고 ’너의 신앙은 나쁜 자세다’ 혹은 ’예수님은 너같이 이중적인 인간을 싫어한다’라고 말한다면 좋은 대화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공간에서 좋은신앙/나쁜신앙에 대한 글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글쓰는 사람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꾸짖는 것이 아니라 꾸짖음을 당하는 대상에는 글쓴이 자신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한 형제가 아니라 지체로서의 모든 형제를 포함한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전체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며 이것이 일반적인 게시판 글이 아닌 묵상글인 이유인 것입니다.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묵상글의 주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생활하고 말하고 가르친 것은 바로 힘든 인생살이의 한가운데였읍니다. 고통이 신앙이 관심을 가지는 전부는 아니지만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신앙을 말할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뒤에 따르는 기쁨과 마찬가지로 고통은 가장 중요한 주제중 하나이겠지요. 오늘날 가장 고통받는 분쟁지역의 사람들을 우리는 항상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디어의 끊임없는 거짓말(가장 큰 거짓말은 ’약자에 의한 테러리즘’이다. 테러는 강자와 약자 모두 다 수행하지만 강자가 주도적으로 수행한다. 히틀러와 부시의 대테러선언을 섞어놓고 누가 한 말인지 맞춰보라고하면 헷갈릴 것이다. 단적인 예는 피해자의 인종,국적,종교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것이 테러냐 아니냐 맞추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미국 언론은 피해자의 소속을 알기전에는 결코 맞추지 못한다)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에이, 망할놈의 세상’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을 외면하고 외피만 서성거리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표현을 다르게 하고도 충분히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다르고 아버지 혹은 가족과 이야기하는 것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얼마전 갈곳없는 할머니들을 모아서 돌보시는 ’사랑의 집’ 수녀님께서 환자를 한분 데리고 오셨읍니다. 인도에서 오신 수녀님으로 얼마동안 데레사 수녀님과도 함께 일했었다고 하더군요. ’이라크에서 미국 경제 제재 조치로 어린이 50만이 죽어갔으며 지금도 매달 5천명의 어린이들이 감염성 설사와 같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읍니다. 이것은 유니세프 보고입니다. 큰 범죄행위입니다. 세상이 미쳤읍니다’ 하니 수녀님은 딱 한마디만 하셨읍니다. ’그렇습니다. 큰 죄악입니다.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읍니다.’
그런데 이 짧은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읍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자를 용기없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런 영적 힘의 바탕 위에서만 우리의 행동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의는 영적 교류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사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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