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과 한 바구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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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1-12-10 | 조회수2,358 | 추천수39 | 반대(0) 신고 |
12월 11일 대림 제 2주간 화요일-마태오 18장 12-14절
"어떤 사람에게 양 백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모과 한바구니>
어제는 위절제 수술을 하루 앞둔 한 형제님을 방문했습니다. 수술후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병자성사를 집전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큰 수술을 앞둔 환자들은 대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수술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잔뜩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가 끝나갈 무렵 그 형제님의 기분은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나중에는 명랑한 얼굴로 저와 스스럼없이 대화도 나눠주셔서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병자성사나 환자방문을 자주 다니다보니 저도 슬슬 전문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어제의 고객은 큰 수술을 앞둔 중환자였기에, 제 나름대로 특별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병자성사를 끝낸 후에는 그분과 조용히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분의 고향과 직업,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월드컵이야기까지...그리고 제가 상습적으로 써먹는 레파토리를 꺼냈습니다.
"형제님, 얼굴 보니까 너무 착하셔서 이런 병에 걸리신 것 같아요. 때로 하고 싶은 말씀은 하면서 사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마음 상하는 일, 가슴에 묻어만 두지 마시고, 화도 내시고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빨리 회복되시면 제가 소주 한잔 살게요." . 그리고 제가 준비했던 본격적인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제 큼지막한 가방에서 예쁜 대바구니 하나를 꺼내서 형제님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왠 빈바구니를 선물하나?"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형제님 코앞에 샛노랗게 잘 익은 모과 하나를 보여드리며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올 가을 저희 수도원 뒷 뜰에 서 있는 모과나무에서 딴 것이었습니다. 모과를 바라다보는 형제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또 다른 모과들을 꺼내어 형제님이 들고있는 바구니에 하나하나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모과가 하나 하나 나올 때마다 모과 특유의 향기가 병실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병실 안의 다른 환자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마침 약 배달 나온 간호사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퍼져나갔습니다.
한 바구니의 모과가 이렇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어쩌면 모과 같은 존재여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잃었던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착한 목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특별히 빼어나지 않지만, 존재 그 자체로 세상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존재 그 자체로 향기로운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사람이 착한 목자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께서 모과처럼 향기로운 존재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고통과 병중에 계시는 환자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들의 고통은 하느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겪고 계시는 그 고통은 하느님 앞에 가장 품질 좋은 향수입니다.
오늘의 묵상 가족 여러분! 제 속좁음으로 인해 평화로웠던 "오늘의 묵상" 코너를 시끄럽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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