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에 중점을 두고 일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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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12-15 | 조회수1,715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대림 제 2주간 토요일 말씀(집회 48, 1-11; 마태 17, 10-13)
엘리야는 죽지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하느님 또는 메시아가 오시기 직전에 다시 오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고 있었다.(말라 3,1.23) 그러므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사실부터 납득되었어야 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미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도 그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깨달았다.
요한은 거리낄 것 없는 날카로운 질책으로 당시의 지도자들의 위선적 행위를 고발하였고 자연 그대로의 생활양식을 따랐으며, 백성들을 회개로 준비시키는 모습과 옷차림(2열왕 1,8)까지도 대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백성들이 엘리야에게 기대했던 것은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집회 48,10),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말라 3,24) 하는 일이었다. 또한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집회 48,10)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엘리야를 본 사람들과 그와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독서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와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주고 백성의 마음을 화목하게 일치시키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서슴치 않았고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하다가 끝내는 허망하게 헤로데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기대대로라면 세례자 요한은 결국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외침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백성들의 시선이 모여지도록 기초작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적당한 때에 말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간 <큰 일꾼>인 것이다.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만드는 그것이 참으로 화목을 도모하고 일치를 이루는 일임을 세례자 요한은 알고 있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새롭게 임원 선출을 하는 모임이 많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끌어갔으면 좋을까? 교회 공동체는 세속 단체와 달라서 능력과 재능, 업적 위주의 일 중심이 되어서는 일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능한 사람들끼리 모여 신앙심만 운운하라는 것도 아니다. 실상 신앙심을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어렵지만 적어도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일보다는 사람들과의 일치와 화목에 더 관심을 갖고, 앞장 서 일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른 이를 위해서 영광의 자리를 비켜줄 줄 아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한 자세로 공동체를 이끌어가기를 사람들은 바라고 있는 것같다.
또한 옳은 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세력있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신의 생각을 소신있게 펼쳐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공동체의 장은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것같다.
어디에 그런 적합한 인물이 있으랴? 다만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여지는 사람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끊임없이 청하는 기도의 사람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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