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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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1-12-22 | 조회수1,595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대림 제 3주간 토요일 말씀(1사무 1,24-28; 루가 1,46-56)
토요일 아침이면 TV에서 주부들의 노래자랑 프로를 즐겨본다. 모두 노래방에서 살다 나온 주부들인가 싶을 만큼 수준이 높다. 요즘은 의상까지 가수처럼 꾸미고 나와서 사회자의 소개를 놓치면 가수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쉽지 않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이며 화답송도 ’한나의 노래’이다. 오늘은 온통 주부들(?)의 노래잔치가 벌어지는 날인 것 같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당시 이유기는 3살 정도) 사제 엘리에게 데리고 와서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맡기고 싶다고 한다. 매년 성전에 와서 기도로 간구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라는 뜻)이다. 아들을 주시면 다시 야훼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한나는 아들을 바치고 찬미가를 올린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 마리아의 노래 역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로 시작되고 있다. 두 노래가 아주 흡사하다.
두 여인의 캐롤(’기쁨의 노래’라는 뜻)은 단순히 아들을 주심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아니다. 그런 의미뿐이라면 오히려 마니피캇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불러야 적합하다. 초대교회의 가난한 신자들의 찬미가였던 마니피캇을 굳이 마리아의 입에 담고 있는 복음사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마리아는 오히려 아들로 인해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프게 될(루가 2,35) 것이라고 예고하면서도 지금 기쁨에 차 노래하는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는 이유 말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인생을 역전시키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찬미이다. 즉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며, 힘있고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보냄으로써 야훼께만 의지하고 진실되게 살아온 사람들의 처지를 역전시켜 주심에 대한 찬양인 것이다.
힘없고 서러운 최하층 빈민들이 고생 끝에 인간 승리를 이루어낸 역전 드라마는 늘 진한 감동을 주고 살아갈 의욕을 준다. 한 개인의 역전승도 그러한데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의 처지가 뒤바뀐다고 한다면 아니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예 없다면 얼마나 신명나는 세상이 될 것인가.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약속, 즉 세상이 뒤바뀌고 인간의 역사가 뒤집어지는 노래이다. 마니피캇은 그래서 어렵사리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끝날 수가 없기에 엘리사벳의 노래가 될 수 없으며, 단순히 다른 부인의 권세에 눌려있던 처지가 역전되었음을 감사하는 한나의 노래의 모방일 수도 없다.
복음사가는 이제 마니피캇을 마리아의 노래로 소개하면서 마리아를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구세사적 사건으로 곰곰이 해석하여 찬미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로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즉 현재 자신에게 벌어진 놀라운 사건을 구약에서의 모든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시키는 하느님 업적으로 이해하며 앞으로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실 주님임을 찬미해 마지않는 신실한 ’하느님의 종’(1,38)으로서, ’주님의 어머니’(1,43)로서 볼 수 있도록 거듭 제시하고 있다.
마리아는 세상을 변혁시키고 인간의 의식을 뒤바꾸어 놓으실 구세주를 세상에 낳아주심으로써 당신이 노래하는 찬미가의 약속을 이룩하는데 최 일선에서 이바지한 분이시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의, 마리아의 아기를 구세주로 인정하는 신앙인들의 영원한 대변인이 되실 자격이 충분히 있음을 복음사가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 어머니의 위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루가복음사가와 성령은(두 분이 복음의 작가이다) 어떻게 생각하실까?
마리아의 처지가 노래처럼 역전되지 못하고 있음이 하필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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