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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보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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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05 조회수1,839 추천수21 반대(0) 신고

 

 

2002, 1, 6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오 2,1-12 (동방 점성가들이 예방하다)

 

예수께서 헤로데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는데 마침 동방에서 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헤로데 왕은 물론 그와 함께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 헤로데는 백성의 대제관들과 율사들을 모두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 캐어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의 (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결코 너는 유다의 요지 가운데서 가장 작은 고장이 아니다.

  네게서 영도자가 나와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양치듯 돌보리라.’"

 

그 때에 헤로데는 점성가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보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찾거든 내게도 알려 주시오. 그러면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하겠소" 하고 말했다.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나갔다. 그런데 마침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드디어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들은 별을 보자 기쁨에 넘쳐 대단히 반가워했다.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 그분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들의 지방으로 떠나갔다.

 

 

<묵상>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동방 점성가들로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에게 ’나타내 보여지셨음’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고요함과 힘찬 움직임이 하나로 모아져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은 고요한 가운데 평화로운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멀리 동방에서 별을 보고 구세주를 찾아 나선 동방 점성가들의 움직임에는 어떠한 커다란 힘이 담겨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곳에 그대로 계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품안에 누워 계십니다. 이렇게 가만히 계신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드러내 보여지셨습니다. 바로 동방 점성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옆 동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히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지만, 멀리 동방의 점성가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방 점성가들은 어떻게 구세주의 탄생을 알게 되었을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의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삶만을 바라보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 자신의 권력에 집착하고 있었던 헤로데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기 예수님의 별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의 별을 볼 필요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이들은 그저 지금 누리는 안락한 삶에 머무르려고 애쓸 따름이었느니까요. 그러나 동방 점성가들은 별을 보았고, 별을 따라가서 마침내 구세주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으로, 동방 점성가들의 행동, 즉 별을 보았던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르 박차고 일어나 별을 따라 간 것을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인지?

 

우리는 지금 살아가면서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요?

겉으로는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개인 기도를 바치면서도 교회 공동체로부터 자기에게 돌아 올 개인적인 이익이나 명예인지? 아니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공동선인지?

 

자신과 가족만의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한 생활인지? 아니면 이 사회의 어두운 현실에 억눌려 지낼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정의와 평화의 삶인지?

 

예수님께서는 분명 구세주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예수님께 다가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고,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지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 역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만 충실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머리로만 생각되어지는 그러한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구세주를 보내심으로 이루고자 하신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은 모든 이가 차별 없이 예수님과 하나되어 복음을 듣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주님 공현 대축일 제2독서인 에페소 3,6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현실에서 주어진 여러 가지 굴레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해방되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되고 억눌린 사람들은 자유를 얻게 되는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이 곧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 심오한 계획에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입이나 머리만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계획에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만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하나 하나씩 삶에서 이루어가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동방 점성가들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별을 보아야 그 별을 따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앞길에 놓인 돌들을 치우기 위해, 혹시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할 지도 모르는 삶의 걸림돌들을 치우기 위해, 땅만 보고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걸림돌을 피해갈 수는 있었겠지요. 하루 하루 자신의 삶 안에만 머물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각박해지고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가지는 오늘의 기쁨은 우리에게서 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하늘을 봄으로써 땅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에게는 땅 만이 아니라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진정 우리 안에서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될테니까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알려주는 한 줄기 별빛을 보고 싶습니다. 더 이상 어두운 밤길을 헤메고 않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과연 우리가 지금 제대로 그 길을 가고 있는 지를 알 수 있을테니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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