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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릎 꿇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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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17 조회수2,117 추천수13 반대(0) 신고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말씀(마르 1,40-45)

 

지금에야 이런 말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당시엔 나병이라 하면 하느님이 내리시는 천벌, 저주라 여겼다. 그러기에 나병은 하느님만이 낫게 할 수 있는 병이었다.

 

당시에 나병환자 자신도 그렇게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느님께 청해보지 않았겠는가?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지 않았겠는가? 기도하고 탄원하고 원망하고 다시 매달리고 온갖 것을 다 해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번쩍 띄어서 예수 안에서 신비로운 능력을 알아보는 행운이 불쑥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깨끗하게 되는 꿈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단락에서 ’깨끗’이라는 단어가 무려 4번이나 나오고 있음을 주목한다.)

 

전에 나는 ’무릎 꿇리기 좋아하는 하느님’이 싫다고 고해성사 신부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하느님’이라고 말씀드렸다. ’언제나 항복하고 백기를 들고 나와야 직성이 풀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런 상황이 또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불쑥 불쑥 찾아오는 시련과 역경들은 종류도 다양해서 때론 생존의 기반까지 뒤흔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겨운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원망과 미움, 분노마저도 모두 사그라지고 또 ’무릎을 꿇은’ 것은 지나온 날들을 반추해보면서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간 날들의 나의 죄상을 조목조목 반성해서가 아니라, 지난 세월동안 내게 베풀어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나하나 떠올리면서였다. 그런데 그 은총과 사랑을 그동안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하고 방치했었던가 하는 후회와 죄스러움에 그토록 완강했던 반항과 오기는 실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그토록 조리정연했던 미움과 원망은 맥없이 주저앉고 만 것이다.

....................

그런 상태에서 이제 모든 것은 나의 뜻이 아닌 그분의 뜻대로 일 수밖에 없었다. 옹기장이이신 그분이 다시 나를 진흙으로 되돌려놓은들 어떠하리....

 

사람들과 접촉이 불가능했던 상황을 뛰어넘어 ’예수께 와서 무릎을 끓고 애원하는’ 그도 이미 해볼 것은 다 해보고 백기를 든, 세상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젠 자신의 꿈은 간데 없고 주님의 뜻만 남은 상태의 고백이다. "’하고자 하시면’ 깨끗하게 고쳐주셔도 좋고, ’하고자 하시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렇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단순한 포기와 체념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지어내는 비굴한 행동도 아니다.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라는 식의 경쟁에서의 패배선언은 더더욱 아니다. 누가 감히 하느님과 경쟁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분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은 완전히 없어지고 그분만 남는 오롯한 ’의탁’인 것이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뒤로 남겨두고 그분께 나아감이 아니라, ’그분이 아니면 나도 없는’ 뒤로 물러설 한치의 여지(餘地)도 없는 의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구마다 사제서품식이 거행되고, 좀 있으면 수도자들의 서원식이 거행되는 시기이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하는 행위는 바로 ’그분이 아니면 나도 없다’는 온전한 의탁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마지막까지 몰려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니라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그분 앞에서 취해야할 기본 자세가 아니겠는가?

 

요즘은 장궤틀이 없어진 본당이 많아서 참으로 아쉽게 생각된다. 뻣뻣이 서서 드리는 미사보다 무릎을 꿇는 것이 참으로 그분께 합당한 예절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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