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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25 조회수1,445 추천수12 반대(0) 신고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말씀(사도 22,3-16; 마르 16, 15-18)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를 변화시킨 어떤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안에는 이 사건에 관한 기사가 세 번이나 나오는데, 첫 번째(9,1-43)는 제 삼자가 옆에서 본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두 번째(22, 3-16)와 세 번째(26, 4-18)는 바울로 사도가 직접 증언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세 기사는 모두 루가복음사가가 기록한 것으로서 바울로 사도 자신이 자기의 편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바울로를 변화시킨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장황하고 길게 한 작품에서만 세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하여, 바울로 자신은 놀랄만큼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갈라 1,15-16; 1고린 9,1. 15,8-9)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서간 어느 곳에서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일반화시킨 이야기로 대치하고 있음을 본다(로마 8, 29-30 참조).

 

주목해 볼 것은 루가라는 제 삼자는 ’엄청난 섬광을 목격하고 고꾸라져 장님이 된’ 외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바울로 자신은 내면 깊은 곳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에, 그 만남이 ’하느님의 섭리’였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 사건을 다룰 때, 말에서 떨어진 바울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성서에는 말을 타고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사건을 다룬 예술작품들의 영향인 듯 싶다.

 

17세기의 화가 카라바치오(Caravaggio)의 감동적인 그림 ’성 바울로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을 보면, 깡마르고 참을성 없게 생긴 바울로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힘없이 벌리고, 팔은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멀어버린 눈을 그대로 감고 있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묘사되어있다.

 

좀 전에 말에 올라탄 상태는 어떠했을까? 자신있고, 당당하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늠름한 상태였으리라. 이제 왜 화가는 바울로를 말 위에서 떨어졌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말 등에서의 추락이 아니라 그의 세속적인 권위와 권력은 물론, 내면적인 자신감과 그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서의 추락까지 그려내고 싶었던 것같다.

 

거기에 천재 화가 카라바치오는 어둠 속에서 바울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마부의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조금 전까지 자기의 등에 올라탄 기세등등한 젊은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한발을 치켜올린 말의 동정어린 배려를 그림의 중앙에 놓고 있음으로써 바울로가 겪고 있는 이 사건이 바울로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과 자만심이라는 말에서 떨어져, 완전한 밑바닥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한 바울로. 이제껏 밝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진리가 참 진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눈이 먼 장님의 표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렇듯 문학으로, 그림으로 표현된 바울로의 회심사건은 작가 나름의 표현(형상과 색채와 문학적 기법)으로 바울로 사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바울로의 ’변화의 삶’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삶’을 이끌고 있는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 불렀는가?’라는 의심이 문득 드는 날이 있다. 좀 더 확실하게 번쩍이는 섬광 속의 주님을 보고 싶어한다면, ’아무개야!’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대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일생 그분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언제 우리는 그분을 만났는가?’ ’언제 그분이 우리를 불렀는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바울로의 주님 현존체험은, 소명체험은 자신의 서간에서 나타나듯이 말로써 설명될 사건이 아니라, 삶 안에 깊이 받아들여지고 일생의 삶으로 재 표현되어야 할 어떤 변화, 어떤 이끌림이라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못 들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아무나 들을 수 없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해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다만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각자 타고 있는 말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분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이제까지 보고 있는 줄 알았던 그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만남의 의미를 되새김질 할 ’아라비아 사막으로의 여행(갈라 1,17)’이 때때로 필요할 것이다.

 

참고 서적: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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