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알면서 왜 청하라고 하시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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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1-26 | 조회수1,984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성 디모테오와 성 디도 주교 기념일 말씀(2디모테오 1,1-8; 루가 10,1-9)
"얼굴 마담"이란 제목으로 ’제자들의 자세’에 관해 이 복음을 가지고 썼던 것이 얼마 안된 터라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마침 바울로사도의 큰 협조자이며 동료였던 디모테오와 디도의 기념일을 맞아 오늘은 ’주님의 일꾼들’에 관해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일흔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면서 가장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다. 당신의 일을 시키면서 일꾼을 ’알아서 보내주시지 않고 왜 우리에게 청하라고 하시는가?’ 항상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 의문을 풀어준 사건이 있었다.
새로 지은 본당으로 분가(分家)를 했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꾼이 턱없이 모자랐던 때의 일이다. 내가 속한 주일학교도 주일 미사에 평균 200명이 나왔지만 경험 있는 교사는 겨우 두 명으로 둘 다 40대가 넘는 늙은(?) 교사였다. 나머지 두 명의 보조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입도 벙긋 해보지 못한 신참들로 시작 전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어쨌든 4명이 교감, 교무, 성가대를 나눠 맡으면서 두 학년을 한꺼번에 전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들은 새 성당에서 새로운 각오로 아이들을 열심히 보내 주셨으나 정작 교사를 하라고 하면 꽁무니 빼기 바빴다. 몇 달 동안 두 명이 충원되고는 그만이었고 교실도 아직 없는 상태에서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방광염이 걸렸다.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남편은 그때까지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집에서는 아프다는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교사회합에 들어가기 전, 캄캄한 성당에서 조배를 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셨죠? 그래요. 당신이 청하라 하셨으니 제가 청하는 겁니다. 이제 일꾼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더는 못하겠습니다. "
한참을 울며 주님께 공갈 협박을 하다가 눈물을 닦고 회합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인지 생시인지 교사가 한꺼번에 세 명씩이나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교사회합 전에 ’복음 나누기’를 한 시간 하는 것이 우리의 관례였는데, 마침 그날 복음 중에 ’도망’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방광염에 걸린 일과 힘들어서 교사 직분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짜내던 일, 그러나 그러지도 못하고 성체 앞에서 울며 일꾼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하고 방금 나왔는데 이렇게 빨리 청을 들어주셨다는 이야기를 감격에 겨워 숨도 쉬지 못하고 줄줄이 꿰었다.
새로 나온 자매들의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멈칫거리며, 계속된 수녀님의 요청에 못 이겨 오늘 직접 뵙고 못한다는 말씀을 드리러 나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허무한 심정이라니...
그런데 기적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각오는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교사들이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는지 몰랐다는 것과 이주에 한번씩이라도 돕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의 부업이 있는 어머니들이었기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라도 잡아야 했다. 이주에 한번씩이면 어떠하리... 그저 뒤에서 아이들의 뒤라도 돌보아줄 일손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후에 이들(=’하느님이 보내신 일꾼’들)은 자신들의 부업을 스스로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점점 교사의 직분에 매진하며 보람을 찾아나갔다. 지금은 교사를 천명(天命)으로 여기고 있으며 다른 본당으로 이사가서도 자진해서 교사일을 맡고 있는 베테랑 교사들이 되었다.
이후에 나는 그들이 ’제발로 걸어들어온 일꾼’, 또는 ’능력이 있어서 뽑은 일꾼’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정말로 그들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서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이었던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들이 언제나 나와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는 일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으로서 그들의 결점까지도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그들의 다른 의견까지도 하느님이 뜻하신 바 있어 보여주신다는 의식을 갖게 하였다. 적어도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하느님의 속사정’을 함부로 덮어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후자의 생각은 능력있는 ’일꾼’에 주안점이 있기보다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에 주안점을 두는 사고이다. 즉 ’일’보다는 ’사람’, 또 ’그 사람을 파견하신 분’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모인 공동체는 서로의 장점뿐만 아니라 서로의 단점까지도 뜻이 있고, 서로의 다른 의견들은 나 개인의 시각을 넘어 공동체 ’공동의 유익과 즐거움’으로 넓혀졌으며, 서로간의 사랑을 배워나가며 확인하는 살아있는 학습장이 되었던 것이다. 실상 우리는 ’교사’로서 불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런 점에서 늘 배우는 ’제자’로서 불리움을 받은 것이었다. 아직도 그 때의 그 ’제자’들은 어디에 떨어져있던지 그때를 그리워하며 그런 공동체를 또 만들기 위해 각자의 처소에서 노력하고 서로 상의하고 있다.
일흔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 많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청하라는 당부를 제일 처음 하시는 주님의 속내는 이렇듯 먼저 세상 사람들에게 나가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께 간청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으로 동료들을 인식하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먼저 제자들 사이에서 그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이후의 수많은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울리는 징’과 같고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같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조사에서 성직자들에게 물었다. 성직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인간관계를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한다. 그런데 일반 신자와의 관계가 아닌 같은 성직자들과의 관계라 했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 신자들도 일반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같은 신자들과의 관계가 더 힘드는 것은 아닐까? 오늘 복음 말씀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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