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음의 고삐를 놓치지 말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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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2-04 | 조회수1,900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말씀(2사무 15,13-16,13; 마르 5,1-20)
복음은 ’수많은 악령’의 횡포에 끌려다니던 한 사람이 예수에 의해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려진 사건이다. ’군대’라고 이름 붙일정도로 많은 악령의 집합체에게 휘둘리는 그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황폐하고 흉악한 모습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몇 가지의 문제를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그를 사로잡은 악령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가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어떤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인가? 그가 예수를 따라 다니겠다고 했을 때 예수는 왜 거절하시며 돌려보내셨을까?
며칠 전에 ’통독성서’ 피정을 하게 되었다. 성서본문을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가며 마음에 닿는 구절이나 단어 또는 대목에 표시를 해둔다. 빠른 속도로 읽는 목적 중 하나가 어떤 이성적인 작업들(기억, 해독, 분석과 같은..)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어떻든 그렇게 한 복음서를 다 읽고 나서 표시해둔 부분을 차분히 묵상하는 개인묵상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요즈음 내 마음 안에 꽉차게 들어있던 갈등과 고민들이 마치 채를 바친 듯이 걸러내졌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한 해답까지도 골라져 떠올라왔다는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내가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고 미처 의식치 못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결과를 보며 우리 마음 안에는 우리를 두려움과 어둠에 묶어두려는 어떤 기류들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에서 풀어내고 끄집어내려는 어떤 움직임이 마음 자체 안에 <혼재>해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그것들을 각각 구분지어 ’선과 악’, ’어둠과 빛’과 같은 대립된 개념으로 이름지어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고 완전한 딱 두 개의 것으로 가를 수 없듯이 세상 어떤 것도 딱 두 개의 선명한 대립개념으로 구분지을 수는 없다. 잘 들여다보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어느 한쪽 면이 강하게 나타나 보일 뿐, 그것 안에는 상호의 움직임이 늘 혼재한다는 것이다.
군대라는 악령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는 어떤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산이나 묘지를 돌아다녔다 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항상 돌로 짓찧었다고 한다. 즉 그의 삶은 생명을 거슬르고 파괴하는 죽음을 지향했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대한 기류에 늘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죽음을 지향하는 것, 소외시키는 것, 변화를 두려워하고 고착화시키는 것이 소위 악령이라고 우리가 이름붙인 세력, 움직임, 기운일 것이다.
악령들린 사람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처방은 그 사람을 쇠사슬, 쇠고랑으로 점점 더 단단히 얽매는 것이었다.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옥죄는 처방 역시 죽음과 소외에 협조하는 ’악령’의 방법인줄 자신들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그 ’악령의 집합체’ 속에서 ’사람’을 발견해낸다. 예수께서 ’악령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그 사람’과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움직임’의 정체를 구분해내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써 있게 하는 것 즉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예수의 일이며 사명이다. (’소외’는 본래 철학 용어로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들은, 또 우리 복음서 독자들은 예수와 같은 능력이 있는 분이 왜 하필 돼지들을 물에 빠져죽게 했냐고 돼지의 생명을(?) 아까워한다. 하지만 이 대목은 만일 악의 기운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에 대한 결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죽음을 향하는 악의 기운은 결국 자신이 의탁하고 있는 대상의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역할도 목적도 끝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 의해 왜 예수는 그 사람이 따라오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셨는지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이제까지 악령에 휘둘리고 사로잡힌 생활을 하였다. 그에게는 삶을 자신이 직접 주도하고 개척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같다. 자신의 깊은 내면(집)으로 돌아가 정체성을 찾고 사람과의 관계(가족)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는 것이 또다시 예수를 줄래줄래 따르는 것보다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의 삶을 누구에게도(비록 예수라 할지라도) 끌려다니지 않고 주체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아가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는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간 이후, 자신이 선택한 지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일을 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는 주님의 일(예수를 알리는..)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도에 의한 일인 것이다. 주님은 그에 맞는 처방을 주셨던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멀쩡한 정신’ 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는 수많은 악령의 세력에서 해방된 인간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렇다고 그가 악령에서 말끔히 해방되어 다시는 어둠과 두려움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어떤 어려움에도 초월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선과 악, 어둠과 밝음의 온갖 대립된 느낌과 생각들이 마음 안에 혼재되어있는 존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고, 어느 한쪽에도 극단적으로 치우침없이, 자신의 주체를 잃지않는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 듯 싶다.
우리는 악의 기운은 송두리째 없애버리고, 선의 기운만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방이다. 한쪽을 뿌리채 없애려고 들기 전에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혼재되어있는 것이 우리임을 알고 그대신 자신의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는 흐름의 정체를 파악하여 하느님의 처방(생명, 희망, 해방의..)으로 해결해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선한 기운만 가득 차면 최선일 것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바리사이파도 자신들은 늘 선하고 거룩한 쪽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시도 아마 자신은 테러를 근절하는 선한 용사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판단은 그렇게 상대적이고 어수룩하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전에는 정의인줄 알고 서슴없이 행했던 것이 얼마나 경솔한 판단이었는지 나중에야 후회되었던 일이 없는가?
어느 한쪽의 세력이 너무 커지지 않을 때 ’멀쩡한 정신’으로 걷잡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마음의 고삐를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악령의 세력에게 정신을 쑤욱 빼주지 않는 관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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