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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선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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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범 쪽지 캡슐 작성일2002-03-02 조회수1,520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2002-03-02)  - 야곱의 우물에서

독서 : 미가 7,14-15.18 - 20 복음 : 루가 15,1-3.11 - 32  

 

  

[최선의 지식]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 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고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루가 15,1-3.11 - 32)  

 

 

성 아우구스티노는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

 

나 자신이 바로 죄인이요’ 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자신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당연시하는 사람일수록 ‘나는 무죄’라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듯하다.

 

자신의 판단과 잣대, 가치관만이 옳다고 굳게 믿는 이들, 자신의 신앙은 너무도 확고하여 베드로의 경우와는 처음부터 달랐다고 맹세하는 이들일수록 그러하다.

 

그런 이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기준, 즉 죄목이 많다. 물론 그 촘촘한 그물망을 빠져 나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테지만.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고상함과 도덕심, 신앙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그들 사전에 ‘회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사건건 이들과 논쟁을 벌이시고 부딪치곤 한다. 예수님이 죽어라 옹호하고 감싸고도는 이들은 바로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죄인’이라고 상대도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죄인들과 어울렸다는 바로 그 대목에서 나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엉성한 신앙심, 부끄러운 예수님 삶 닮기 등등을 보더라도 분명 나는 죄인인데 이런 나를 끝까지 예뻐하시고 편들어 주신다니’….

 

하느님 나라의 신비, 구원의 신비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리사이나 율사들과 한 줄에 서 있는 나를 본다.

 

너는 이래서 안 되고, 너는 이래서 아니고,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며 쉬임 없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기 바쁜 나를 본다.

 

내가 설정한 틀에 맞지 않으면 밖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밀쳐낸 나의 세상은 좁긴 하지만 일견 평온하고 견고해 보인다.

 

죄인 중의 죄인인데 나는 그걸 모른다.

 

그저 내가 밀어낸 죄인들과 허물없이 먹고 마시고 웃고 재미나게 몰려다니시는 예수님을 보며 투덜대고 있을 뿐이다.

 

                                   장영예(가톨릭 파트너십 연구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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