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헨리 뉴엔과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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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2-03-02 | 조회수1,754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말씀 (루가 15, 1-3. 11-32)
지금 제 옆에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Return of the Prodigal Son)’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의 왼편에는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들이 있습니다. 이들과는 거리를 둔 오른편에서는 이 광경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큰아들이 지팡이를 짚고 완고하게 서 있습니다.
주요 관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포옹일 것입니다. 아들의 모습은 남루한 누더기를 걸쳤고 신발은 낡아 발뒤꿈치가 닳아 없어졌으며 그나마도 한 쪽은 벗겨져 있습니다. 벗겨진 한쪽 발이 더럽고 굳은살이 박혀있는 걸로 보아 그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어떠한 처지에 있었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 품에 안겨 약간 옆으로 돌려진 깡마른 얼굴과 숱이 다 빠진 머리는 아버지보다 더 늙어보일만큼 피폐하고 곤궁해 보입니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짓물러 있어 이 장면에서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 만큼 지쳐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활짝 편 강한 두 손은 아들의 쪼그라든 등을 넓게 감싸주고 있어 아버지의 너그럽고 따스한 사랑은 지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웬디 베케트 수녀님의 해설을 인용해봅니다. "그들이 포옹했을 때, 아들은 후회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말렸다." 물론 성서에는 없는 말이지요. 그러나 수녀님의 설명은 예리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 순간 조용한 침묵의 친밀감 속에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포용되는,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구석에서는 "마치 판관과 같은 자세로,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뻣뻣하게" 형이 서 있습니다. "그는 포옹을 원하지도 않으며,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하인들까지 포함하는 일가족으로부터도 한걸음 물러서" 있습니다.
큰아들은 그동안의 아버지의 고통과도 무관한 얼굴이며 그가 의지하고 있는 지팡이는 땅바닥에 완고하게 뿌리박혀있어, 아버지와는 다른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법과 정의에 의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한 아들을 얻는 순간, 반대편에서 다른 아들을 잃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맞습니다. 주름잡히고 짓무른 아버지의 눈은 그래서 언제 성하고 마를 날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림은 몇개의(붉은색, 황토색, 검은색) 색채만 사용했는데, 아버지와 큰아들이 등에 걸치고 있는 넓고 붉은 외투는 아버지 집의 풍요한 상황을 말해주며, 그 풍요로움과 전혀 반대가 되는 작은아들의 누더기 옷은 황토색입니다.
그 적은 색깔을 가지고도 농도를 조절해서 등장인물들의 외부적 상황과 내면까지 표현하고 있는 천재 화가 렘브란트는 아들 하나를 제외하고는 자식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으며, 남은 아들 하나마저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었답니다. 그런 렘브란트에게 있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와 그것을 표현한 이 그림은 단지 머리나 가슴만으로 이해되는 감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20세기 미국의 삼대 영적 스승이시라는 헨리 뉴엔 신부님은 이 그림을 보고 당신의 영적 여정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그 책을 짧게(?)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잃었던 아들의 돌아옴(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헨리 뉴엔]
"내가 ’돌아온 아들’을 처음 보았던 해에, 나의 영적 여정은 세 단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작은 아들로서의 내 자신의 경험이었다." 신부님에게도 몸과 마음도 매우 지친 기간이 있었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쉬고 싶었던 그때는 마치 둘째 아들의 상태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자신이 작은 아들과 얼마나 동일한지를 친구에게 설명했는데 그는 "차라리 큰아들과 닮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후 신부님의 영적 여행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엔 한번도 당신이 큰아들처럼 느껴졌던 적이 없었으나 일단 그 가능성을 열자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큰아들과 같이 충실했던가를 새삼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으며, 견진을 받았고, 여섯 살 때 이미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한번도 마음 변한 일 없이 서품을 받았고, 부모님, 선생님, 주교님, 무엇보다 하느님께 항상 순종했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새로운 자신의 모습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질투심, 분노, 성급함과 완고함과 무뚝뚝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묘한 독선을 보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불평을 했고, 화를 잘 내왔는지를 보게 되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왔지만, 결코 ’집’이주는 기쁨을 완전히 맛보지 못했다. 내가 받았던 모든 특권들에 대해 감사하는 대신에 나는 매우 불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위험을 겪고 돌아와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던 작은 아들과 같은 형제들과 자매들을 질투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작은아들의 단계에서 큰아들의 단계를 맞이한 기간이었죠.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단계가 시작되었죠. 서품 30주년을 맞이한 어느 날, 신부님에게 또다시 어두운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공동체에서 더 이상 안정감을 느낄 수 없어서 내적 치유를 받기 위해 렘브란트와 ’돌아온 아들’에 관한 책 이외에는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친구들과 공동체를 떠나 방황했습니다.
엄청난 내적 고통의 시간을 겪는 동안 지원과 용기를 주었던 친구와 함께, 렘브란트의 그림이 걸려있는 에르미타즈 궁을 방문했을 때, "현재의 당신이 작은 아들이든지 큰아들이든지, 당신은 결국 아버지가 되도록 불려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라는 친구의 말에서 결국 영적 여정의 세 번째 단계를 열게 되었답니다.
"그 말은 마치 천둥번개 같은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결국 나는 그 그림과 함께 하며 그의 아들을 끌어안은 노인을 바라보는 내 삶의 기간 동안 그 아버지가 내 삶의 성소를 가장 잘 표현하였다는 사실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계속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진실한 성소-돌아오는 아들에게 한마디 질문도 없이 또한 그 어떤 요구도 없이 환영해 줄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소명-를 요청받고 있어요. 그림 안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그렇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우리와 당신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좋은 친구나 또는 심지어 친절한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우리는 당신 자신이 참된 자비의 권위자로서 자신을 요구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될 것을 바라고 있어요."
그의 조언이 있은 후 ’아버지이기를 추구했던 시기’가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매우 더디고 견디기 어려운 투쟁이었으며 때때로 여전히 아들의 위치에 남아있고 싶은 열망에 싸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자비의 행위로 손을 얹으면서 거대한 기쁨을 맛보고 있으며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을 환영하는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작은 아들과 큰아들, 그 어느 쪽이냐는 질문을 자신에게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헨리 뉴엔 신부님처럼 자비로운 아버지의 쪽에 서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나는 지금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영적 여행을 가고자 하는 여러분들이 역시 하느님의 잃어버린 아들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비로우신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바라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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