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답답한 인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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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2-03-09 | 조회수2,067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3월 10일 사순 제 4주일-요한 9장 1-41절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
<답답한 인간>
태생소경! 말만 들어도 갑갑한 마음이 들게 하는 단어입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많지만 태생소경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암흑의 세계를 살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공짜로 실컷 볼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전혀 동떨어진 삶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찬란한 일출이나 감명 깊은 낙조, 밤하늘을 곱게 수놓는 무수한 별들, 황금빛 들판...태생소경에게는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외와 저주를 밥먹듯이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더욱 그들을 슬프게 했던 일은 태생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데, 사람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당사자의 과실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규명해나가는데 있어서, "고통은 고통 당하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고통관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은 안 보이는 것도 서러운데,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뒤집어 쓰고 나온" 중죄인 취급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더욱 이 소경이 자신을 비참하게 여겼던 이유는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의의나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당하는 고통도 아니고 민족을 위한 고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할 시련도 아닙니다. 치유되리라는 기약도 없이 한평생 소경으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더 이상 불행할 수가 없는 사람, 그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이었습니다.
그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눈을 떠보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생소경의 철저한 소외, 심연의 고통, 죽음보다 더한 좌절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비참함이 예수님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태생소경이 한 평생 지고 살았던 십자가는 당장이라도 멀리 집어던지고 싶은 애물단지였지만, 결국 예수님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은 갖는 삶의 고통이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한계나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줍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은 비록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 그 자체임을 느꼈습니다. 그런 그분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때로 육체의 소경이 영혼의 소경보다 훨씬 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영혼의 소경이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영혼의 눈을 뜨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육체의 눈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또 다른 바리사이파 사람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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