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떻게 하면 잘 죽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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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양승국 | 작성일2002-03-11 | 조회수2,064 | 추천수16 | 반대(0) 신고 |
사순 제 4주간 화요일-요한 5장 1-3절, 5-16절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 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어떻게 하면 잘 죽지?>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었던 병자의 몰골이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나마 지니고 있었던 가산은 이미 치료비로 모두 탕진한 지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빚진 돈을 제때 갚지 못해 밤낮으로 가족들은 빚쟁이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병세가 호전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38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병석에 누워있다 보니 친구나 친척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모두 떠나버려 이제 자신의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었습니다. 이제 병자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과제라고는 "어떻게 하면 잘 죽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자렛 예수란 사람이 나타나 불치병도 고쳐주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식을 친구 거지로부터 전해들었지만, 그것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려니 생각하고 아예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38년간의 악몽과 방황의 세월, 고통과 혼란의 세월을 떨치고 일어서라도 외치십니다.
이윽고 38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온 병자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일어나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이 누워 있던 병자의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예수님의 그 한 마디 말씀은 신비롭게도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되고 형언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환자를 일어서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우리의 하느님은 38년간을 기다려오신 인내의 하느님이십니다.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 38년 산 구제불능의 불치병 환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면서 "문제아" 하나를 두고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마다 "문제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가 절실히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아이에 대해서는 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내가 저 녀석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재는 싹수가 노랗습니다. 재는 유전인자부터 벌써 범죄형입니다." 라고 한 아이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아이가 이런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순전히 저 아이 잘못만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가 생길 그 당시 분명히 저 아이가 처한 상황에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저 아이가 살아온 배경을 조금이라도 우리가 눈여겨본다면 충분히 저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저 아이가 지금은 이런 문제 행동을 일으키고 혼란상태에 빠져있지만, 저 아이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문제는 잘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새 출발하시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은 일상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십자가 그 이면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을 읽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더불어 인간이기에 매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나 좌절, 실패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꾸준히 나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돈보스꼬의 교육방식은 무엇보다도 한 아이의 역사와 성장 과정 안에서 벌어졌던 나름대로의 고충과 상처를 깊이 이해하려는 애정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아이 안에 잠재하고 있는 개선과 발전의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아이 안에 닿아있는 하느님의 흔적과 손길을 읽습니다.
한 아이가 오늘 비록 부족하고, 실수하고, 때로 상황이 낙담할 만큼 혼란스러워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늦었지만 한 아이의 새로운 출발과 재도약을 위한 노력을 다시금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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