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보여주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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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범 | 작성일2002-03-16 | 조회수2,015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02-03-16) - 야곱의 우물에서 독서 : 예레 11,18-20 복음 : 요한 7,40-53
[하느님 보여주시오!]
그때에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또는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했다.
이렇게 군중은 예수 때문에 서로 갈라졌다. 몇 사람은 예수를 잡아가고 싶어하였지만 예수께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를 잡아오지 않았느냐?” 하고
경비병들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희마저 속아넘어갔느냐?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전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끼여 있었는데 그는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한마디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요한 7,40-53)
몇 년 전 본당 정문에 ‘잃은 양 찾기 운동’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그랬더니 어느날 한밤중에 술에 취한 청년이 사제관 문을 때려부술 듯이 두드려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뜸 “잃은 양이요” 한다. 문을 열고 나갔더니 “신부님은 천국을 확신하십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는데 계속 같은 질문을 하길래 “그래, 확신한다” 했더니 비가 퍼붓는 그 와중에 맨바닥에 꿇어앉더니 하느님을 보여주기 전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기에 “자네가 만일 이 자리에 24시간 꼼짝 않고 있으면 내가 하느님을 보여 주지”라고 했더니 정말이냐고 하더니 평생이라도 그러고 있을 듯이 두 손을 합장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에 나와 보니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기에 다시 타일렀다. “자넨 하느님이 ‘어디 계시오? 여기 한번 나와 보시오’ 하면 ‘그래, 여기 있다’ 하고 나타나는 분인 줄 아느냐? 그런 하느님이라면 믿지 않겠다.
만남이란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내일 다시 찾아오게.” 그러나 그는 신부님이 보여준다고 약속했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쳤다.
할 수 없이 “좋다. 24시간만 버텨라. 그럼 보여주지” 하고는 들어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하늘은 맑게 개었지만 그 잃은 양은 사라져 아직도 소식이 없다.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 세상에는 신비와 문제 두 개의 범주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신비의 영역을 마치 풀면 답이 나오는 수학 공식이나 검증할 수 있는 실험이나 증명될 수 있는 명제처럼 처리하고자 한다.
인간의 삶뿐 아니라 생명이 신비요, 존재 자체가 신비인 것을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마저도 문제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신비는 소유의 개념에서처럼 잡거나 버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성서를 샅샅이 뒤져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임문철 신부(제주교구 서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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