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유의 경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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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태범 | 작성일2002-03-20 | 조회수1,794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02-03-20) - 야곱의 우물에서 독서 : 다니 3,14-20.91-92.95 복음 : 요한 8,31-42
[자유의 경지]
그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테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따졌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너희에게 내 말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일러준 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며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한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우리는 사생아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 와 있으니 만일 하느님께서 너희의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
(요한 8,31-42)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술회하면서 “십오륙 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 스스로 설 수 있었고, 사십에 불혹했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고, 육십에 어떤 것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 칠십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고 하였는데, 이 마지막 경지를 술회한 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는 사십을 넘어 오십이 내일 모레인데도 불혹은커녕 유혹만 점점 더 많아진다.
우리는 늘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 7,’14-15)라는
바오로의 고백처럼 죄에 사로잡히고 종 노릇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살아도 모두가 법도에 들어맞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진리를 찾아 얻은 사람, 내적 자유를 체험한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도 그런 자유를 얻고 싶어서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바로 진리이며, 당신이 바로 자유를 주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신다. 자유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시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공자의 칠순 경지와도 다르고, 석가의 해탈과도 다르다. 스토아 학파처럼 스스로 충족함으로 행복을 누리는, 자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시어”(필립 2,’6-8) 사랑의 종으로서의 자유를 제시하신다.
“아름다운 구속인 걸, 주말에 해야 할 일들이 생겼어’~”(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 하는 노래처럼 오직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임문철 신부(제주교구 서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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